책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지만 어떤 서점은 건재하다. 여전히 불을 밝히고 동네 한 귀퉁이에서 사람들을 맞는다. 이들이 살아남은 비결은 각양각색이지만 결국 ‘취향’이라는 단어로 수렴된다. 서점지기의 취향이 명확하고, 그 취향에 따른 책 선정이 빼어날 때, 서점을 찾은 독자들의 취향이 그에 응답한다. 개성이 분명하고 특색 있는 서점은 오래 버틴다. 독특하고 색다른, 자기주장 강한 독립 서점들이다.
“인식하면 비로소 보이고 들리는, ‘탐조(探鳥)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서점에서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꼭 책뿐일까. 책을 매개로 공동의 경험과 관심사를 나누는 특이한 서점이 의외로 많다. 수원 팔달구에 있는 ‘탐조책방’도 그중 하나다. 새를 관찰한다는 의미의 ‘탐조’에 관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최근 찾아간 책방 입구 탁자에는 6개의 나무로 된 새집이 놓여 있었다. 벽에는 아파트 단지에 사는 황조롱이, 곤줄박이, 진박새 등의 특징과 서식 위치를 그려놓은 ‘아파트 새 지도’가 걸려 있다. 탐조 관련 책 300종과 함께 탐조를 위한 각종 쌍안경·굿즈가 있는 이곳은 ‘새의 모든 것’을 모아놓은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탐조 전문 책방이다.
“쌍안경 속 저 멀리 나뭇가지에 앉은 작은 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짝사랑에 빠지죠. 같이 ‘탐조(새에 빠지다)’ 하실래요?”
2021년 4월 박임자(53)씨가 문을 연 ‘탐조책방’은 정적인 독서와 동적인 탐조를 동시에 하는 것이 특징이다. 책만 파는 게 아니라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아 직접 탐조를 나간다. 지난 11일 책방에선 동호인 8명이 경기 수원시 일월저수지에 있는 기러기를 탐조하러 나갔다. 이날은 초보자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으로 ‘우리 동네 새 사전’(비글스쿨), ‘초보 탐조기’(팥배나무), ‘동네 공원에서 새 관찰하기’(현북스) 등의 입문서를 소개하고, 겨울 철새로 유명한 일월호수에 나가 기러기 떼 수천 마리가 호수에서 날아오르는 모습을 직접 관찰했다. 책방은 매달 말 인스타그램에 어떤 탐조 프로그램을 진행할지 공지한다. 새에 관한 신간이 나오거나 특이한 새들이 관찰됐을 때도 긴급하게 알린다. 매달 진행하는 탐조 프로그램엔 평균 10~15명 정도가 참여한다.
책방지기 박씨는 안산의 한 아동 보호 전문 기관에서 10년 동안 심리 치료사로 일하면서 지난 2015년 탐조에 입문했다. 직업상 매일같이 다른 사람들의 고민거리를 들어주며 쌓인 스트레스를 풀 방법을 찾다가 시에서 운영하는 생태관을 찾아간 것이 시작이었다.
“새들은 ‘관심이 없으면 인식되지 않는 존재’였어요. 탐조는 지쳐 있던 제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어 줬죠.” 가족들도 박씨 덕분에 탐조인으로 거듭났다. 심장 질환을 앓고 있던 박씨의 어머니 정맹순(84)씨는 2018년 대수술을 받고 회복이 더뎌 딸의 권유로 2019년부터 아파트 단지에 사는 새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책방 입구에 걸려있던 ‘아파트 새 지도’. 이것을 바탕으로 ‘맹순씨네 아파트에 온 새’(피스북스)’라는 책도 출간했다. 2020년 8월 29일 어머니, 언니와 함께 자연 활동 공유 플랫폼 ‘네이처링’에 책방의 전신인 ‘아파트 탐조단’ 페이지를 만들어 본격적인 탐조를 시작했다. “우리나라에는 텃새와 철새를 합쳐 모두 580종 정도의 새가 있는데, 처음 1년 동안 저희 아파트 단지에서만 47종을 찾았어요. 사진을 찍어 ‘네이처링’에 올렸는데 그게 인기를 끌 줄은 몰랐죠. ‘아파트 탐조단’이 책방으로 이어지게 된 계기였습니다.” 3명이서 시작한 아파트 탐조단은 이달 13일 기준 470명으로 불어났다. 현재 이곳에는 조류 관찰 기록이 총 1만2927건 올라와 있다.
책방을 연 뒤 탐조 활동은 더 자주 이어지고 있다. 매년 3~4월에 책방을 찾으면 ‘뿔논병아리’가 일월호수에서 짝짓기 철에 맞춰 춤추며 구애하고, 4~5월쯤 둥지를 만들고 태어난 새끼를 업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7~8월엔 여름 철새인 ‘물총새’가 번식하고 물고기를 잡아 새끼에게 먹인다. 박씨는 “우리 책방은 동네 아파트나 인근 호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새들을 위주로 책을 선정하고 탐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며 “진입 장벽이 낮아 2030 젊은 사람들이나 초등학생·중학생 자녀를 둔 가족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박씨는 “새를 사랑하는 일이 환경을 바꾸는 중요한 시작점”이라며 “책방을 통해 탐조인을 늘려 도시에서 새들과 함께 공존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는 2020년부터 아파트 단지에 있는 나무에 친환경 인공 새집을 설치하는 일을 하고 있다. 박새, 참새 등은 나무 안쪽에 큰 공간을 만들어 둥지를 트는데, 도시의 나무들은 굵지 않아 그 대안으로 위험한 아파트 실외기 등에 둥지를 틀어 인간과 새 모두 불편한 상황이 생긴다. 인공 새집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새들의 번식을 도와 친환경 살충도 가능하다. 그러나 아파트 단지 대부분 사유재산이라 허락받고 활동하기 어려운 상황. 박씨는 “‘우리나라 탐조지 100′(자연과생태)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은 마지막 장을 ‘101번째 탐조지는 우리 동네다’로 마무리한다”면서 “먼 곳에 나가 탐조할 수도 있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새들을 관찰하는 탐조 프로젝트를 꾸준히 만들어 나가고 싶다”고 했다.
[탐조책방의 PICK!]
●화살표 새 도감(자연과생태)=대표적인 탐조 입문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새 357종을 수록하고 그중 대표적인 241종을 선별해 생김새 특징을 사진과 함께 자세히 설명했다. 새가 물에 떠 있는지, 물가를 서성이는지, 비둘기보다 큰지 작은지 등 누구나 알 수 있는 기준에 따라 새를 분류해 정리했다.
●탐조일기(카멜북스)=만화로 읽는 새 이야기. 20대 여성 탐조 인플루언서 ‘삽사롱’이 탐조의 세계에 빠져드는 과정을 담았다. 인스타툰으로 연재해온 기존 콘텐츠를 보완하고 미공개 에피소드를 추가했다. 탐조책방에 방문하는 2030 젊은 탐조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만화책.
●동네에서 만난 새(가지출판사)=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는 새들의 생태 이야기를 모았다. 생활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새 60여 종의 먹이 활동, 구애 행동, 소리와 몸짓 등 새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일본에서 야생동물 조사원으로 일했던 저자가 관찰한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고 글을 썼다.
-조선일보 2025.1.14. 김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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