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지만 어떤 서점은 건재하다. 여전히 불을 밝히고 동네 한 귀퉁이에서 사람들을 맞는다. 이들이 살아남은 비결은 각양각색이지만 결국 ‘취향’이라는 단어로 수렴된다. 서점지기의 취향이 명확하고, 그 취향에 따른 책 선정이 빼어날 때, 서점을 찾은 독자들의 취향이 그에 응답한다. 개성이 분명하고 특색 있는 서점은 오래 버틴다. 독특하고 색다른, 자기주장 강한 독립 서점들이다.
서울 남대문시장 건너편, 지하철 4호선 회현역 4번 출구로 나와 50m 정도 언덕을 올라간다. ‘아리랑 포차’ ‘통영옥’ ‘진도집’…. 분위기가 푸근한 골목식당과 사뭇 다른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유리 통창 너머로 파우치·노트·포스터 등 각종 잡화가 보인다. 편집숍일까? 흰 글씨로 큼지막하게 ‘WELCOME(환영합니다)’ 문구가 적혀 있다.
2022년 12월 문을 연 서점 ‘스틸북스 회현’이다. 2018~2021년 한남동 사운즈한남에서 운영한 ‘스틸북스’ 브랜드를 이어받았다. 지금은 서울 곳곳에서 도시 창작자들을 위한 코워킹·코리빙(co-working·co-living) 공간 사업을 하는 ‘로컬 스티치’라는 스타트업이 서점을 운영한다. 로컬 스티치는 회현에 둥지를 틀면서 조명 브랜드 ‘일광전구’ 쇼룸, 말레이시아 식당 ‘아각아각’, 카페 ‘유월커피’ 등 8개 사업장이 모인 ‘브랜드 타운’을 만들었다. 작은 건물 6개가 옹기종기 붙어 있다. 서점이 그 중심에서 손님을 끌어당기는 역할을 한다. 서점을 구경하고 자연스럽게 바로 옆 식당, 카페 등으로 발걸음을 잇게 된다.
‘스틸북스’ 책방 지기 강태희(47)씨는 20년 넘게 콘텐츠 중심 공간 기획을 해왔다. 앞서 학전과 명필름 공간 기획에 참여했다. 강씨와 매니저 2명, 파트타이머 2명 등 총 5명이 ‘스틸북스’를 운영한다. “직전까지 떡볶이 집이었다”는 이곳은 떡볶이 먹기엔 따스한 채광이 아깝다. 리모델링을 거쳐 책방으로 거듭났다. 서점은 건물 1~3층을 쓴다. 4~6층엔 로컬 스티치 사무실과 공유 오피스가 있다. 바깥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1층을 ‘웰컴 센터’라고 부른다. 잡지와 노트는 물론 각종 잡화를 비치해 ‘힙한’ 편집숍 같은 분위기를 냈다. 궁금증을 유발해 손님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이다.
2~3층은 본격 서점이다. 큐레이팅이 돋보인다. “도시 창작자에게 영감을 주는 책”을 판다. 일·삶·쉼·흥 등 키워드가 적힌 서가에 다양한 책이 놓였다. 이를테면 ‘일’ 서가엔 ‘야, 너도 다른 회사에 갈 수 있어’(리얼러닝) ‘이직 바이블’(얼라이브북스) 같은 제목의 책이 비치돼 있다. 요즘 직장인의 주요 관심사를 간파한 것. 물론 업(業)과 자아실현에 대해 묵직하게 성찰하는 책도 있다. 강상중 도쿄대 명예교수의 ‘나를 지키면서 일하는 법’(사계절), 일본 철학자 나가야마 겐의 ‘밥벌이는 왜 고단한가’(이데아) 등이다.
강씨는 “대형 서점과는 확연히 다른 책 선정”이라며 “의무적으로 신간을 넣지도 않고, 고전이나 스테디셀러 중에서 시의성이 있는 책을 넣기도 한다”고 했다. 정치적 혼란기인 요즘은 2015년 개정판인 박상훈의 ‘정치의 발견’(후마니타스)을 꺼내 뒀다. “반응이 좋아요. 그 책 앞에서 머무는 손님들이 많더라고요.” 3층에는 유유·브로드콜리 같은 개성이 뚜렷한 소규모 출판사 책을 모아 진열했다.
“평일에는 적으면 몇 십명, 날씨 좋은 주말에는 하루 평균 400명까지도 서점을 찾는다”고 했다. “매출 다각화는 필수”다. 북토크 외 각종 브랜드와 협업에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다. 최근엔 만년필 브랜드 몽블랑, 해외 명품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 신발 브랜드 캠퍼 등과 협업했다. 몽블랑은 서점을 대관해 글쓰기 수업을 열었다. 보테가 베네타·캠퍼는 자체 잡지를 만들면서 서점에서 홍보하고 싶어했다. ‘스틸북스’에서 책 얼마어치를 사면 해당 잡지를 무료로 배포하는 식으로 행사를 진행했다. “보테가 베네타 잡지 행사를 할 때는 멋지게 차려입은 ‘패피(패션 피플)’ 분들이 왔어요. 이렇게 저변을 넓히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얼마 전부터는 ‘10분 독서클럽’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마치 바(bar)에 양주를 키핑하는 것처럼 구매한 책을 서점에서 읽고, 두고 갈 수 있도록 했다. 인근 직장인들이 점심때 찾아와 책을 읽다 가는 경우가 많아 고안했다.
‘텍스트힙’이라는 말이 유행하지만, 서점 경영은 쉽지 않다. 온갖 콘텐츠가 넘쳐 나는 시대, 우직하게 책을 읽는 독자는 귀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책을 읽어야 할까?’ 책방 지기의 숙명과 같은 질문이다. 강씨는 “책은 제일 가성비 있는 콘텐츠”라고 했다. “책 한 권에 응집된 에너지를 생각하면 이만큼 가성비 있는 콘텐츠가 없어요. 꾸준히 좋은 책을 소개하고, 어떻게 소개할지 계속 고민하는 수밖에 없죠.”
[스틸북스의 PICK!]
●스테디셀러 3권=최혜진 ‘에디토리얼 씽킹’(터틀넥프레스), 비비언 고닉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바다출판사), 벨 훅스 ‘올 어바웃 러브’(책읽는수요일). 재고를 쌓아두지 않고 1~2권 정도만 들이는데, 꾸준히 재주문 중인 책들.
●BGM(배경 음악)=레코드 가게 겸 음악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웨이브 레코드’의 플레이리스트를 담은 책 ‘도쿄디깅’과 ‘뮤직 포 레이트 모닝’에 실린 음악들. 실제 서점에서 나오는 BGM이기도 하다.
●최적의 시간=한적함을 원한다면 평일 오전·저녁 시간. 다른 사람들이 어떤 책을 고르는지 궁금하다면 주말 오후 시간 방문을 권한다. 운영 시간은 오전 11시~오후 9시.
-조선일보 2025.1.21.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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