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일상, 기억, 그리고 역사: 해방 이후 한국미술과 시각문화’.
우리가 망각한 과거 부산의 파편들, 기억 지배하는 기록의 힘이 살린다
- 개인·단체가 활동하며 남긴
- 기록물 중 가치 있는 자료들
- 잃어버린 도시의 과거 환기하고
- 미래 부산 정체성 닦을 초석 돼
- 시립미술관이 소장한 4만여 점
- 제대로 된 아카이브로 작동못해
- 체계적으로 관리될 시스템 절실
올해는 부산 피란수도 70년이 되는 해다. 1023일간의 피란수도 부산의 의미와 가치를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올리려는 노력을 하는 가운데, 피란수도 7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카이브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논의되었다. 기록보관소로 번역되기도 하는 아카이브는 개인이나 단체가 활동하며 남긴 기록물 중 가치 있는 자료나 그것을 보관하는 장소 및 시스템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 미술이나 문화영역에서는 ‘아카이브 열병’이라 칭할 정도로 활발하게 아카이브 자료를 전시나 연구의 기초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그것은 아카이브가 우리가 망각하거나 망실한 것들을 환기하는 기억장치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으로 치러진 ‘일상, 기억, 그리고 역사: 해방 이후 한국미술과 시각문화’(1997, 광주시립미술관) 전은 극장간판, 영화 포스터, 만화, 광고, 영상 및 사진, 인쇄출판물을 비롯해 광고용 구조물, 패션, 일상의 오브제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시각 이미지 아카이브로 구성된 전시였다. 이 전시는 아카이브 활용을 통해 해방 이후 망실된 기억을 재편하고 기존 미술사와는 다른 확장된 미술 개념을 제시하는 한편 전통적인 역사보기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아카이브를 활용한 전시나 연구는 실물 자료의 망실과 망각으로 성글게 남겨진 기억을 당시의 파편으로 남은 다양한 관련 자료로 재구성해 대안적 이야기를 마련하는 초석이다. 아카이브는 우리가 잊었던 과거의 기억과 파편화된 기억의 퍼즐을 맞출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지만, 그것이 과거의 기억 그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가 아카이브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카이브를 통해 오늘과 미래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역사를 통해 현재를 파악하고 미래를 예비하는 것에 비견할 수 있다. 다만, 역사가 승리한 자들이 써 내려간 이야기라면 아카이브는 그것을 축적한 그리고 그 아카이브를 사용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의 ‘특정한 법칙이 반영’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아카이브는 승자의 역사 너머에 있거나 혹은 역사의 저변에 짓눌려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더 나아가 기존의 법칙이나 체계에 균열을 내고 다시 보기 할 수 있게 함은 물론 그것을 통해 대안적 서사와 스토리텔링, 문화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아카이브는 조명되지 못한 채 주변과 지역으로 남겨져 있던 것들의 결을 드러내고 논의구조 내로 그것들을 소환하게 하는 훌륭한 장치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아카이브는 포스트모던 이후의 지역과 주변의 정체성 구현을 위한 첨병 역할을 담당한다.
미술관의 오랜 전신이 신기하고 진귀한 것들을 모으는 인간의 호기심에서 비롯한 ‘호기심 상자 (Cabinet of Curiosity, 혹은 Wunder Kammer)’였다는 점은 인류가 가진 축적하고 분류하고자 하는 의지를 반영한다. 현재 부산시립미술관이 소장 중인 4만여 점의 미술 자료들은 잊거나 망실된 우리의 기억을 환기하거나 대안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아카이브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축적되고 분류된 미술 자료들이 ‘호기심 상자’의 차원을 넘어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 운영될 수 있는 아카이브 시스템 도입이 선결되지 않은 까닭이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시대를 담는 기억장치로서의 아카이브 시스템을 도입할 때다. 그래야만 1023일간의 수도 부산의 삶과 일상은 물론 우리가 잃어버리거나 망각한 부산 미술의 모습과 부산의 이야기를 살필 수 있으며 그를 바탕으로 부산의 정체성을 써 내려갈 초석을 마련할 수 있다.
-국제신문.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 20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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