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위) 전은경 월간 '디자인' 편집장
디올에는 헤리티지 매니지먼트팀이 있다. 창업자인 크리스찬 디올을 연구하고 유산과 흔적을 찾는 것이 주 업무로, 경매나 빈티지숍을 훑어 오래된 쿠튀르 드레스나 작품을 다시 사들이고 자료를 확보하는 일을 한다. 물론 드로잉이나 작은 항수병처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두는 좋은 습관을 지녔던 무슈 디올 덕분에 가능했던 자산이다.
헤리티지(heritage·유산)와 아카이브(archive·자료 축적) 관리를 가장 잘하는 곳은 아무래도 럭셔리 패션 브랜드다. 디올뿐만 아니라 루이비통이나 에르메스, 샤넬처럼 자신의 이름이나 가문의 이름을 건 브랜드일수록 창업자의 전기나 아트북, 브랜드 히스토리북쯤은 여러 권 갖고 있기 마련이다. 대형 전시를 열거나 자체 박물관을 갖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 다양한 아카이브를 보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문화적 유산을 쌓고 오늘의 아카이브 관리에도 공을 들이는 이유는 당연히 비즈니스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아카이브와 헤리티지의 중요성을 누구나 잘 알고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전략적으로 관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넘쳐나는 자료는 컴퓨터에서 삭제되거나 휴지통으로 들어가는 일이 태반이다.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기는 수십 년 역사의 기업에서도 자료나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답변을 들은 적이 많았다.
몇 년 전 애플에서 나온 제품 사진집 '디자인 바이 애플 인 캘리포니아'가 화제였다. 20만원이 넘는 가격에도 사고 싶어 하는 디자이너가 많았다. 그런데 애플 역시 자료 축적에는 신경을 덜 썼던 모양이다. 조너선 아이브 전 부사장은 책과 관련해 "너무 현재와 미래에만 몰두해서 그런지, 문득 우리가 만드는 물리적 제품을 모아둔 카탈로그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아카이브 자체가 유산이 되는 건 아니지만, 헤리티지는 오늘의 아카이브를 통해 쌓아가는 것만은 확실하다. 내일의 헤리티지를 쌓고 싶은 기업이라면 일단 잘 모아둘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 전은경 월간 '디자인' 편집장. 202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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