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일장기를 재활용한 태극기’를 보여주는 박건호씨.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라는 책을 펴낸 그는 “일장기에 덧칠한 파란 물감은 거의 지워졌고 사괘는 급하게 그린 티가 난다”며 “광복 당시 흥분이 느껴진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30년간 1만점 역사 수집가 박건호
광복절을 앞둔 거리에 태극기가 펄럭인다. 75년 전 해방은 느닷없이 왔다. 일제에 35년간 짓눌린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싶었지만 구하기가 어려웠다. 반대로 일장기는 흔했다. '일장기를 재활용한 태극기'를 보여주며 박건호(51)씨가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일장기에 파란색을 덧칠해 태극 문양을 만들었을 거예요. 기쁜 나머지 사괘(四卦)를 차분히 그려 넣을 여유는 없었겠지요."
이 수집가가 꺼낸 태극기는 원래 광목으로 만든 일장기였다. 그 위에 칠한 파란색 물감은 거의 지워져 흔적만 남아 있었다. 사괘는 급하게 그린 티가 역력했다. 15년 전쯤 경매 사이트에서 구했다는 이 낡은 태극기에 대해 그는 "식민 지배의 상징인 일장기에서 쓸모를 발견했다는 점에서 당시 광복을 맞은 한국인의 감격과 환희를 느낄 수 있다"며 "얼룩과 때도 역사"라고 했다.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휴머니스트)를 펴낸 박씨는 입시 학원 한국사 강사다. 30여 년간 1만점 가까이 모았다고 한다. 책은 사진과 편지, 일기 등 평범한 물건에 담긴 한국 근현대사를 풀어냈다. 지난 11일 서울 강남 대성학원에서 만난 그는 "수집 취미를 가지고 나서야 교과서로 배운 역사가 반쪽짜리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가 배운 역사는 반쪽?
먼저 객관식 문제 하나. 박씨는 서울 독립문 앞에서 찍은 가족사진 한 장을 지난해 수집했다. 사진 속 독립문에는 태극기가 게양돼 있고 그 아래 '대한민국 독립 1주년 기념'이라는 현수막이 보인다. 독립 1주년은 언제일까? ①1897년 11월 21일 ②1920년 3월 1일 ③1946년 8월 15일 ④1949년 8월 15일
―저는 정답을 못 맞혔습니다.
"③번을 고른 독자가 많을 거예요. 땡입니다. 그 사진에서 '독립'은 1948년 정부 수립을 가리켜요. 미군정 3년 지배에서 벗어나 홀로 섰다는 의미를 표현하고 싶었던 겁니다. 정답은 ④번이에요."
―독립문을 언제 왜 지었는지 아는 사람도 드물겠지요.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형식적으로는 청의 속국이었습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이 이듬해 일본과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 제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로 시작해요. 청에서 독립한 걸 기념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립한 거예요. 독립문 정초식이 열린 1896년 11월 21일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 시대의 '광복절'이었던 셈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문은 파괴되거나 수난을 당한 적이 없어요. 일본이 조선에 준 은혜를 과시할 기념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독립문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독립문을 서대문형무소와 묶어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인식하기 때문이에요. 독립문에 담긴 '독립'이 본래 의미를 뛰어넘어 시대에 따라 일제에서 독립, 미군정에서 독립 등으로 소비돼온 겁니다. 건립 취지로 보면 어색한 퍼포먼스였지만 대중이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니 과거로 돌아가자고 할 수는 없지요."
―1987년 서울대 국사학과 1학년 때 강원도 양양에 답사를 가서 빗살무늬토기 파편을 주웠다면서요.
"그 일을 계기로 수집가가 됐어요. 컬렉터로 더 성장하게 된 전환점도 있었습니다. 1876년은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으로 알려진 해인데 당시 사람들은 빗방울에 더 관심이 있었어요. 병자년 4~6월에는 기우제를 지낼 정도로 가물었습니다. 역사를 전공했고 가르치고 있지만 그해에 가뭄이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몰랐어요."
―교과서에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거시적 역사만 배우는 바람에 제가 아는 지식은 반쪽짜리였던 겁니다. 그때부턴 수집을 하면서 개인을 탐색하는 미시사(微視史)에 더 관심을 기울였어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나머지 반쪽을 알아가는 중입니다."
―1946년 호열자(콜레라) 창궐에 따른 '학생 귀향 명령서'도 신선했습니다.
"저는 대학 졸업할 때 여운형에 관한 논문을 썼어요. 좌우 합작에 관심이 있었고 1945~48년은 비교적 소상히 안다고 생각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정치사 너머 그 시대 사람들의 일상에 대해선 아는 바가 별로 없었던 거예요."
―'쥐 났다' '바가지를 긁다' 같은 표현이 호열자와 얽혀 있다고요?
"그 병에 걸리면 마치 쥐가 사지에 오르는 듯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고통을 겪다 죽었어요. 민간에서는 호열자를 막으려고 대문에 고양이 그림을 붙여놓기도 했지요. 다리 근육에 경련이 나면 '쥐 났다'고 하는 말에 전염병의 역사가 숨어 있는 거예요. 바가지를 시끄럽게 긁으면 쥐통을 떨쳐낼 수 있다고 믿었는데 거기서 '바가지 긁는다'는 표현이 파생했습니다."
수집품에 숨 불어넣는 글쓰기
강의할 땐 학생들에게 수집품을 보여주며 흥미를 끈다. 청일전쟁을 가르치면서 독립문 사진을 보여주는 식이다. 그는 "한국사가 수능 필수(절대평가)가 되고 나서 문제가 너무 쉬워졌다"며 "입시 학원에서 한국사를 가르쳐야 할지 말지 존폐를 고민할 정도"라고 했다.
―강사 생활도 달라졌겠군요.
"학원 밖 특강이 싹 사라지면서 수입은 줄고 시간은 많아졌어요(웃음). 수집한 자료를 정리할 겸 이렇게 책을 썼지요."
―수집이란 무엇입니까.
"역사의 흔적과 대화하며 그 시대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지요. 골동품과는 범주가 달라요. 저는 오래되지 않은 물건, 진기하지 않은 물건도 모읍니다. 수집 초기에는 물건에 대한 집착이 심했어요. 지금은 경매에서 물건을 놓쳐도 더 비싼 값에 그것을 가져간 누군가에게 연대감과 동지애를 느껴요."
―대체로 어떤 물건을 수집하나요.
"보통 사람들의 삶이 담긴 자료요. 105㎜ 박격포탄 탄피를 재활용한 재떨이, 미국이 원조한 밀가루 포대로 만든 바지도 있어요. 민중은 전쟁과 가난마저 일상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비극을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봅니다. 역사적 사건이 반영된 자료를 선호하고,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찾아가는 작업에 재미를 느껴요."
―속물적이지만 그동안 들인 비용은.
"1억~2억원쯤 될 거예요. 수집품은 1000원짜리부터 중고차 한 대 가격(수백만원)까지 다양해요. 보관 문제 때문에 부피가 작은 종이 문서를 선호합니다. 2000원에 산 19세기 동학(東學) 자료 한 점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20만원에 매입했어요(웃음). 여간해선 팔지 않기 때문에 저한테 가격은 의미가 없어요."
―1941년에 청년 9명이 경성역(서울역)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당혹스러웠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육군특별지원병제 경쟁률이 해마다 높아졌어요. 1943년엔 5330명 모집에 30만3400명이 지원했지요. 자원 입대 열풍이 식민지 조선을 강타한 거예요. 당시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립운동가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수는 시국을 때로는 이용하고 때론 한탄하면서 살았어요. 지원병에 나섰다고 해서 모두 친일파로 규정하기는 어려워요."
―최근에 백선엽 장군 국립묘지 안장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저도 젊은 시절에는 옳은 것과 그른 것, 반일과 친일 같은 이분법을 좋아했어요. 일제강점기 대중의 삶은 스펙트럼이 훨씬 더 다양했습니다. 현재 시각으로 쉽게 단죄하면 안 돼요. 공(功) 때문에 과(過)를 다 덮을 순 없고, 과가 있다고 공을 지울 수도 없지요. 저는 명망가보다 서민들을 다룹니다. 따뜻한 시각으로 보려고 했어요."
―자료 수집이 금광에서 금을 캐는 행위라면 글쓰기는 뭔가요.
"금을 세공하는 일이지요. 하고 나니 뿌듯합니다. 10년 안에 책 5권을 내는 게 목표예요. 사소한 자료는 있을지언정 사소한 사람, 사소한 역사는 없습니다. 먼지를 털어내고 이야기를 입혀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운명처럼 내게 온 물건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 조선일보 2020.08.15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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