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1-03-15 09:46
1960∼90년대 공연예술 검열 대본·서류 원본 첫 공개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82328 [427]

(사진1)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이 11일 공개한 1960년대부터 1990년대 공연 심의 대본엔 당시 검열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다. 사진은 한 페이지 통째로 ‘삭제’ 도장을 받은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 대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 제공
(사진2) '개작' 조치를 받은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의 표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 제공
(사진3) '청춘신호' 공연 허가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 제공


예술위, ‘달리는…’ 등5900여편
‘수정’·‘X’자 긋고 ‘삭제’ 도장도
시대 따른 검열 양상 비교 가능


“현 시점에서 본 작품의 주제가 부적당하다고 사료되어 반려합니다.”

한국공연윤리위원회가 1978년 10월 심의한 윤대성의 희곡 ‘노비문서’ 공연 대본 두 번째 페이지에는 심의의 흔적이 수기(手記)로 남아 있다. 대본 표지 심의결과에는 ‘반려’라고 적혀있다. 1973년 4월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노비문서는 몽고군의 침입이 빈번하던 고려시대 충주성을 배경으로 한 역사적 사건을 신분갈등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관리와 노비의 신분해방을 둘러싼 갈등과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다. 구체적인 반려 사유는 대본에 보이지 않지만 반려 시점이 유신체제가 말기를 향하던 때인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예술기록원은 11일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1960년대부터 1990년대 공연 예술 심의대본과 심의서류 5900여편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서류는 문교부(1961~66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1966~76년), 한국공연윤리위원회(1976~86년), 공연윤리위원회(1986~87년) 등에서 심의한 대본 등이다. 이제껏 검열의 흔적이 지워진 심의대본을 공개한 적은 있지만 원본을 대규모로 공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심의를 거친 대본 원본을 통해 시대에 따른 검열 양상 등을 보다 심층적으로 비교·대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공개 자료에는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다수 포함돼있다. ‘달리는 바보들’(최인호 작, 극단 중앙, 1975년), ‘난조유사’(오태영 작, 제작극회, 1977년), ‘아침에는 늘 혼자예요’(김광림 작, 극단 연우무대, 1978년),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이강백 작, 극단 실험극장, 1978년) 같은 국내 작품과 ‘커피 속의 일곱얼굴’(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작)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우디 알렌 작) 같은 외국 작품을 번안한 대본도 있다.

심의대본에는 구체적인 검열의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대사나 지문에 줄을 긋고, ‘수정’ ‘삭제’ 등의 도장이 찍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장소현 원작의 ‘별 따기’에는 “문둥이 발싸개 같은”에 ‘수정’ 도장과 함께 “더러운”으로 고쳐 쓰도록 적혀 있고, “그 쓰다버린 문둥이 발싸개보다 백배는”에는 밑줄과 함께 ‘삭제’ 도장이 찍혀 있다.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 대본에는 한 페이지 전체에 빨간 줄로 ‘X’자가 그어지고, ‘삭제’ 도장이 찍혀 있기도 했다.

이들 대본은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선정적이고 거친 표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검열을 받았다. 아르코예술기록원 김현옥 학예연구사는 “앞선 시기에는 정권과 관련해 사상적인 측면에서 문제가 되는 게 많았으나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서 외설적인 부분 등 청소년을 위해 유해 정보를 차단한다는 측면을 많이 지적한다”고 설명했다.

공개된 심의 대본 등은 한국영상자료원, 연극배우 김화영, 연극평론가 한상철, 연극평론가 구히서, 극작가 김의경 등으로부터 기증 받은 자료가 바탕이 됐다. 지난해 입수한 추가 자료 170여건도 상반기 안에 디지털화해 서비스할 예정이다. 자료는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www.daarts.or.kr)를 통해 디지털로 열람할 수 있다. 단 저작권 문제 등으로 외부에선 볼 수 없고, 기록원을 방문해야 열람 가능하다.



-국민일보. 김현길 기자. 2021.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