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 총리실 산하 제주4·3위원회의 희생자 결정 당시 제출된 ‘4·3 희생자 유족 심의·결정 요청서’ 사본들이 켜켜이 쌓여 전시됐다.
(사진2)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기념관에서 ‘제주4·3아카이브전-기록이 된 흔적’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3) 제주4·3 아카이브전이 열리고 있는 제주4·3평화기념관 전시실.
4·3 사진·문서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추진
‘평화·인권, 화해·상생·포용’ 4·3 정신 세계인 속으로
평화재단 ‘기록이 된 흔적전’ 아카이브 구축 시초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기념관 2층 기획전시실에 가면 전시장 가운데 아이 키만큼 쌓아 올린 A4 용지 기둥 45개가 눈길을 끈다. 2000년 이후 총리실 산하 4·3위원회의 희생자 결정 당시 제출됐던 ‘4·3희생자 유족 심의·결정 요청서’ 사본들이다. 이 속에는 1만4천여명에 이르는 희생자들의 마지막 순간들이 담겨 있다. 비극의 규모와 진상 규명, 명예회복 운동이 벌어진 이유를 곱씹게 한다.
전시실 한 귀퉁이에서는 누렇게 빛바랜 ‘석방증’, ‘통행증’ 등 각종 증명서를 볼 수 있다. 신용카드 크기보다 다소 작은 이 증은 70여년 전 삶과 죽음을 갈라놓은 종지쪽지였다. ‘선량한 백성’임을 뜻하는 ‘양민증’이 없으면 폭도가 됐고, ‘석방증명서’를 받아야 가족들을 볼 수 있었다.
집에서 점심을 먹다가, 밭에 일하러 갔다가 누군가에게 연행돼 소식이 끊긴 아버지와 형, 오빠들이 어느 날 갑자기 대전, 마포, 대구 등지의 형무소에서 보낸 엽서에는 자신보다는 그리운 가족과 부모의 안부를 묻고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다려도 더는 엽서가 오지 않았다. 전시실의 빛바랜 엽서들은 70여년의 세월을 머금은 채 그날의 모습을 보여준다.
제주4·3평화재단이 지난해 말부터 오는 6월까지 여는 ‘제주4·3아카이브 특별전―기록이 된 흔적’전은 문자로, 사진으로, 영상으로 4·3을 말하고 있다. 전시회는 4·3 당시와 진상규명·명예회복 운동 과정에서 나온 각종 문서, 사진, 도서, 영상, 신문 등으로 구성됐다. 이번 전시는 4·3평화재단이 수집한 자료들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다른 기관이 소장한 자료까지 빌려와 그동안 나눠 소개했던 4·3 자료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4·3을 기억하는 일은 4·3의 진실과 역사적 교훈을 미래세대에 전승하는 작업이다. 과거사의 기억과 가치를 전승하기 위해서는 기록의 중요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4·3 연구자들은 “4·3의 흔적이 담긴 기록을 발굴하고 가치를 알려야 한다. 기록의 전승이야말로 4·3의 진실은 물론 평화와 인권이라는 역사적 교훈과 가치를 확산하는 데 유용한 도구다”라고 말했다.
4·3기록물은 통상적으로 제주4·3특별법상 ‘4·3사건’의 기간인 1947년 3월1일부터 1954년 9월24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 과정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된 사건(당대 기록)과 그 이후 전개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운동 과정(후대 기록)에서 생산된 문서와 사진, 영상, 유물 등을 말한다.
당대 기록은 ‘냉전과 분단, 집단학살의 진실’과 관련한 국무회의록 등 정부 쪽 자료, 군경 및 무장대 쪽 자료, 판결문과 수형인 명부 등 행형 자료, 미국·일본 등 외국 소장 사진 및 영상 자료 등이 대표적이다. 후대 기록은 ‘정의와 평화·인권, 화해와 상생’의 기조 아래 희생자 신고 자료(1960년대 국회 1878명, 제주도의회 1만4343명, 총리실 산하 4·3위원회 1만4532명), 각 기관·단체의 진상규명운동 자료, 4·3위원회의 진상조사 자료(진상조사보고서, 희생자 결정 자료, 백서 등), 증언구술자료, 유해발굴 자료, 합동위령제 등 자료, 일기, 회고록, 수기 등 민간자료 등이 있다.
4·3평화재단이 4·3 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에 눈을 돌린 데는 2011년 5월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이 계기가 됐다. 4·3평화재단은 4·3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를 통해 4·3의 역사를 세계인들이 공유하고 평화와 인권, 화해와 상생, 포용의 4·3 정신을 확산시키겠다는 계획을 지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4·3 기록물은 군경 등 토벌대는 물론 무장대의 문서와 사진 등 각종 기록물도 기록유산으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4·3 당시 주한미대사관이나 주한미군사고문단 등이 본국이나 상급기관에 보고한 내용에는 제주도에서 각종 문서를 수집하고, 사진 증거들이 있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 발굴된 기록 자료는 드물다. 19
50년대 국내 신문에도 4·3 이후 제주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나 사진 전시회 등이 열린다는 기사가 있지만 이러한 자료는 발굴되지 않았다.
양조훈 재단 이사장은 “4·3 기록물은 세계적 냉전과 한반도 분단의 당시 정세 속에서 빚어진 국가폭력에 의해 제주도민들이 집단 희생된 비극을 극복하고 화해와 상생, 포용이라는 가치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얀 보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심사소위원장은 2019년 12월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끼친 유일하고 대체 불가한 문서기록이 기록유산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국가든 어두운 시기가 있었고,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사건이 있기 마련이지만, 관련 기록물 또한 매우 중요한 기록유산”이라고 말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국제자문위원회(IAC) 총회가 열리는 2년마다 한번씩 국가별 2건 이내로 신규 기록유산 등재 신청서를 접수해 심사를 거쳐 결정한다. 국내에서는 문화재청에서 사전 접수와 심사를 거쳐 2건을 선정해 아이에이시 총회에 제출한다. 국내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자료는 ‘훈민정음’(1997)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2011), ‘조선통신사 기록물’(2017) 등 16건이다.
4·3평화재단이 여는 이번 기록전이 4·3 기록 아카이브 구축을 위한 시도가 될 것이라고 4·3 연구자들은 입을 모은다. 박경훈 전시 총감독은 “4·3의 역사에서 항쟁 주도 세력들은 올바른 기록물을 남기지 못했다. 살아남은 유족들은 빨갱이로 몰리지 않기 위해 흔적을 지워야 했다. 4·3 자료는 학살의 주역들은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학살의 피해자와 가족들은 빨갱이 낙인을 피하기 위해 사진이나 문서를 태워 없애야 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사진과 문서들은 4·3의 진실을 맞춰가는 소중한 자료들이다”라고 평가했다.
5·18 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를 계기로 세계인들은 5·18을 마주하고 있다. 4·3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 속 4·3의 기억과 가치를 복원하는 일이며, ‘정의’와 ‘평화·인권’, ‘화해와 상생, 포용’의 4·3 정신을 세계인들이 기억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겨레신문. 허호준 기자. 2021.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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