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출간한 일제기문화재피해자료 증보판 표지(황수영 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편, 2015,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과거와 현재 이어주는 맥락 그 자체인 문화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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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습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관계자들과 문화재 전문가들이 그동안 잘 몰랐던 국외문화재를 소개하고, 활용 방안과 문화재 환수 과정 등 다양한 국외소재문화재 관련 이야기를 격주 토요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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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많은 답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맥락’에 주목하고 싶다.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하였다.’ 태종실록에 나오는 이 기록에는 사냥 중 낙마한 사실을 기록하지 말라는 임금과 이를 끝까지 기록하려 한 사관의 모습이 모두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수백 년 전 사냥터에서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임금과 사관의 성격까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풍부한 맥락 정보를 가진 기록은 높은 가치를 지닌다. 단 한 줄만 남아있더라도, 맥락 정보에 집중한 기록은 과거와 현재를 순식간에 이어준다.
우리가 오래된 물건이나 장소와 같은 문화재, 문화유산을 가치 있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문화자원들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맥락’ 그 자체이다. 나라 밖에 있는 오래된 물건 혹은 장소가 간직한 맥락을 찾아나서는 작업은 더디고 힘겹지만, 결과가 우리에게 주는 울림은 크고 깊다.
검증된 문화재 정보는 DB로 구축
데이터베이스(DB) 업무를 시작하며 각국의 국외문화재 정보가 담긴 오래된 자료를 처음 읽던 날은 악몽으로 기억된다. 특히 일본 지역의 이름은 한자 병기도 없이 우리말로 그대로 적혀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흔히 쓰이는 성씨인 다나카(田中)의 경우, '전중씨' 라고 표기돼 있었다. 영미권도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모자(hat) 1점’으로 기록된 정보만 가지고선, 그 모자가 갓인지, 전립인지 혹은 조선시대가 아닌 다른 시기에 만든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국외문화재 자료들을 조금씩 정리해 나가던 중,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를 읽게 됐고 오래된 자료가 가지고 있던 궁금증들이 하나씩 해결되기 시작했다.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는 저명한 미술사학자인 고 황수영 박사가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문화재가 겪은 수난의 기록과 증언을 수집해 기록한 책이다. 원본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책 한번 펴내기 어렵던 시절에 만들어진 자료집 수준의 인쇄물이었다. 철필로 원고를 베껴 쓰고 이를 등사기에서 잉크를 발라 한 장 한 장 인쇄하는 속칭 '가리방'이라 불리는 등사본으로 소량 만들어진 책자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료집은 1973년, 한국미술사학회의 정기간행물 부록으로 배포되었고,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5년 43년 만에 이를 증보 발간했다.
일본 지역 명칭은 기록화 도구의 변화로 생긴 문제라 생각해볼 수 있다. 한자 지원이 안 되었던 문서 환경에서 변환 과정을 거치며 한자라는 맥락 정보가 모두 탈락되고, 한글로 작성된 '음'만 남아 발생한 문제였던 것이다. 기록학에서는 이처럼 기록의 방법이나 틀이 변하는 것을 ‘마이그레이션(Migration)’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잔에 담긴 물을 새로운 잔에 옮겨 담는 과정이라 보면 좋겠다. 마이그레이션의 가장 큰 숙제는 이 과정에서 유실되거나 사라지는 데이터, 자료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동안 연구자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나라 밖을 떠돌고 있는 우리 문화재에 대한 기록을 남겨왔고 이를 또 유실되지 않게 지켜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기술이나 도구의 변화를 겪고, 일부는 잊혀지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초창기부터 국외문화재 정보를 전자문서로 만들어 DB를 구축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DB 구축이란 새로 찾아낸 정보를 담는 것과 동시에 오래전부터 수집된 정보를 꼼꼼히 살피고 이 과정에서 빠진 부분을 찾아 채워주는 일이다.
국외문화재 현황 정보는 다양한 루트를 통해 입수된다. ‘모자(hat) 1점’으로 기록된 정보와 같이, 비록 ‘여기에 한국문화재가 있다’와 같은 가냘픈 정보지만 모든 조사의 뿌리가 되는 것이기에 그 중요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 문화재가 고국을 벗어나 ‘거기에 정말 있는지’, ‘있다면 어떤 상태로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재단은 소장기관과 교섭하여 실태조사를 시행하고 이 결과를 보고서로 출간하고 있다. 보고서 출간까지 마치면 마침내 조사 정보는 재단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관리된다. 다시 말해 국외문화재 데이터베이스 안에 들어간 문화재 정보는 우리 눈과 손으로 직접 검증된 유물들로 채워져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10만 점 넘는 문화재 기록 DB시스템에...절반가량 완성
이런 과정을 거쳐 현재 운용하고 있는 것이 오카이브(OK-Archive)라고 불리는 국외문화재DB관리시스템이다. 2021년 현재, 21개국 630여 기관 10만4,000여 점의 문화재 기록이 담겨 관리 중이다. 현재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20만4,000여 점의 국외우리문화재 현황과 비교하면, 이제 절반 정도의 맥락 정보가 있는 것이다.
국외문화재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문화재는 무엇일까. 놀랍게도 ‘전적(典籍)’이다. 이는 고문헌과 고문서들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흔히 문화재라고 생각하면 떠올리기 쉬운 도자유물이나 회화유물보다, 전적유물이 차지한 비율은 60% 이상으로 압도적이다.
이를 보면 다시 한번 우리의 기록문화에 대해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를 비롯해 수많은 당대 지식인들이 남긴 문집과 같은 기록유산은 너무나도 흔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는지 모르겠지만, 세계적인 시각에서는 전무후무한 위대한 문화자원이다. 고려 사람들은 몽골군의 침략에서도 현전하는 모든 불경을 아로새기며, 부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구하려 했다. 조선왕조는 실록과 의궤를 남겼으며, 이순신 장군은 임진년과 정유년의 침략에 맞서는 힘겨운 상황에서도 담담히 하루하루 일기를 써 내려갔다.
종이와 책을 만드는 기술은 또 어떠한가. 기록이 유실되지 않고 잘 남아 있기 위해서는 기록을 담아낼 지지체가 튼튼해야 하는데, 이제는 너무나 잘 알려진 한지의 우수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몽골군과의 전쟁 중에도 목판에 불경을 새기던 경험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탄생으로 이어지며 기록 기술 또한 발전했다.
이 밖에도 튼튼한 책을 만들기 위해 책 크기와 상관없이 5개의 구멍을 뚫어 실로 엮어 매는 오침안장(五針眼裝)과 같은 전통적인 제책기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전적유물이 오랜 기간 처음의 형태를 간직하며 이역만리에서 남아 있을 수 있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당대 이 땅을 방문한 외국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조선에서 만들어진 책을 가지고 돌아갔다는 사실을 보면,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있는 우리 전적 문화재의 비율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머나먼 길을 찾아갈 때, 데이터베이스는 가장 먼저 꺼내어 펼쳐보는 지도와 같은 존재다. 고민을 두고 우선적으로 살피게 되는 단서와 증거들이다. 다만 구축된 DB정보의 과도한 노출은 상대 국가나 기관을 자극시켜 수면 아래로 숨어들게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들을 활용하지 않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니, 데이터베이스의 활용 범위를 잘 정해서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후대 위해 문화재 DB관리 계속돼야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실록이 완성되니 이를 열람하고 싶었다. 그러나 영의정 황희 등이 나서 임금이 실록을 보게 된다면, 후대 사람들도 보게 될 것이고, 이러면 사관은 제대로 기록을 남기지 못하게 되니 천년 후 실록은 믿을 수 없는 기록이 될 것이라며 만류하였다. 이에 세종은 태종실록 열람의 뜻을 거두었음을 이후 세종실록(세종실록 80권, 세종 20년 3월 2일 병술)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후손들을 위해 기록유산을 남기고 가꾸었던 선조들의 마음을 이어받아, 우리도 현재 수집할 수 있는 모든 맥락을 꼼꼼히 수집하고 기록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만든 데이터베이스를 유실 없이 마이그레이션하여 후손들에게 잘 전해 주는 것이야말로 국외문화재DB관리시스템을 구축한 궁극적인 이유라고 생각해본다.
- 한국일보 2021.07.10 최중화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통합관리시스템 전담반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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