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2-05-19 10:36
[역사 속 명저를 찾아서] 대동여지도, 조선을 지도에 담다
   https://www.mk.co.kr/opinion/contributors/view/2022/05/425623/ [750]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
총 22책으로 구성된 대작
실물 보면 그 크기에 놀라

백두산 7회 등정설은 불확실
필요하면 현장답사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前代 지도 집대성

김정호 생애 기록 적은 것은
그가 중인 신분이었던 탓


지난 4월 2년 이상 시행해오던 사회적 거리 두기가 드디어 종료되었다. 이제는 시간과 숫자에 구애 없이 자유롭게 모이거나, 공연이나 스포츠 관람도 마음껏 즐기며 일상으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19로 모든 것이 불편했던 시기, 가장 하고 싶은 일 중의 하나가 자유로운 여행이었다. 그리고 필자는 그 이름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그 실물의 모습과 어떤 것이 기록되어 있는가는 잘 알지 못하는 '대동여지도'를 향후 여행에 참고할 것을 권한다.

'대동여지도'라고 하면, 대개 김정호(金正浩)가 백두산을 일곱 번이나 오르는 등 우리 국토를 두루 돌아다니며 그린 지도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동여지도'는 전대에 제작된 지도를 최대한 참고하여 만든 지도였다. 물론 필요한 경우 현장 답사를 진행하였지만. 또한 '대동여지도'는 목판으로 찍은 책자 형태의 지도첩 22책이 합해진 지도였다. 목판으로 지도를 제작한 것은 보다 널리 유통시키기 위해서였다.

'대동여지도'는 1책의 함경도 지역부터 22책의 제주도에 이르는 책자를 모아서 펼치면 우리나라 전도(全圖)가 된다. 축척은 약 16만분의 1로, 각 책은 세로 30㎝, 가로 20㎝ 정도의 크기이다. 전체를 펼치면 세로 6.7m, 가로 3.3m의 크기로, '대동여지도' 전체의 실물 모습을 접하면 먼저 그 크기에 놀란다.

김정호가 활동한 시기는 상업이나 수공업에 대한 발전도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상업의 발달은 상인들의 성장을 가져왔고, 원거리 장사를 위해서 정확한 지도가 요구되었다. 이러한 시대의 변화는 김정호의 의욕을 불러일으켰고, 쉽게 접었다가 펼 수 있는 절첩식 형태로 지도를 만들었다. 각 고을의 거리를 십 리마다 표시하고, 상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역(驛)이나 원(院)과 관련된 정보를 최대한 수록하여 수요에 적극 대응한 것이다. 목판본으로 정밀한 지도를 제작한 점에서 김정호는 판각 기술도 뛰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지도 제작을 도와준 동료나 제자들이 상당수 있었고, 이들 중에는 각수(刻手)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도에 관한 한 최고의 인물이지만, 김정호의 생애에 대해서 많은 기록은 없다. 이것은 신분제 질서가 엄격히 적용되던 당시 그의 신분이 양반이 아닌 중인 이하의 신분인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 그나마 그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은 중인 출신 유재건(劉在建·1793~1880)이 1862년에 저술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이다. "김정호는 고산자(古山子)라 하였는데 본래 뛰어난 재주가 있고, 특히 지도학에 깊은 취미가 있었다. 그는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를 제작하고,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새겨 인쇄해 세상에 펴냈다. 그 상세하고 정밀한 것은 고금에 그 짝을 찾을 수 없다.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고 하여, 지도 제작 전문가 김정호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산이 독립된 하나의 봉우리로 표현되지 않았고, 산줄기가 이어진 모습이다. '산경표'에 따라 백두산에서부터 국토 구석구석에 이르기까지 굵기를 다르게 표현하였다. 백두산은 산줄기를 겹겹이 그려 웅대하게, 금강산은 1만2000봉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도 주목된다. 물줄기는 쌍선과 단선으로 묘사하였다. 쌍선의 하천은 배가 다닐 수 있는 수로이며, 단선 하천은 상류로 갈수록 가늘고 뾰족하게 그렸다. 도로는 직선으로 표시하였는데, 흑백의 목판본임을 고려한 것이었다.

'대동여지도'에는 산과 산줄기, 하천, 바다, 섬, 마을을 비롯하여 역참(驛站), 창고, 관아, 봉수, 목장, 진보(鎭堡), 읍치, 성지(城址), 온천, 도로 등의 정보가 담겨 있다. 특히 읍치, 진보, 창고, 역참 등은 지도표를 만들어 쉽게 활용하도록 하였다. 글씨를 줄이고, 내용을 기호화하는 방식은 지금의 지도와 유사한 방식이다.

조선 산천의 모습을 지도에 담고, 그것을 다시 목판으로 하나하나 새겨 대중화를 꾀한 점도 '대동여지도'의 미덕이다. 향후 여행을 떠날 때는 '대동여지도'에 그 지역이 어떻게 표기되어 있는가를 살펴보고 나설 것을 권한다. 전통 시대의 지역 모습이 현재에 변화된 양상을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 매일경제신문 2022.05.14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