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4-19 13:44
[박선희 기자의 따끈따끈한 책장]숲처럼, 갤러리처럼… 당신의 서재 취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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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50418/131446971/2 [0] |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5만 권에 달하는 방대한 책을 갖춘 서재로 유명했다. 그의 서재를 본 사람들은 여지 없이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이 많은 책을 다 읽으셨어요?”
에코는 한 수필에서 그런 유의 질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투덜거린 적이 있다. ‘다 읽은 책을 도대체 왜 책장에 꽂아두겠냐’는 거였다. 그의 반문은 책장에 대한 평범한 사람들의 통념을 뒤짚는다. 다 읽은 책이 꽂혀 있는 책장은 엄밀히 말해서 죽은 책장이다. 그런 책장은 사냥의 전리품을 박제해 진열한 것처럼, 오래전 독서의 추억과 성취감을 상기시키는 용도로 책을 활용한다. 하지만 에코처럼 현재 읽는 책, 앞으로 읽을 책이 더 많은 책장은 읽기를 멈추지 않는 탐독가들의 지적 팽창력이 꿈틀대는 미지의 숲이다. ‘살아 있는’ 책장이다.
탐독가들에게 책장은 주기적으로 가지치기와 분갈이를 해 줘야 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책장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주제에 따른 분류다. 멜빌 듀이가 1876년 창안한 DDC(Dewey Decimal Classification·듀이 십진분류법)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책장 정리 방법으로, 대부분의 공공도서관이 이에 따라 책을 정리한다. 철학, 종교, 사회과학 등 10가지 대주제에 따라 장서를 정리하는데 국내 도서관도 이를 한국적으로 보완한 한국십진분류법을 따르고 있다.
이를테면 듀이는 책 정리업계의 고전적 슈퍼스타이고, 도서관에 들락거리는 걸 삶의 낙으로 삼아온 많은 탐독가들에게 ‘무릇 교양인의 책장이란 주제에 따라 정리돼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심어 주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책을 반드시 주제에 따라 정리하라는 법은 사실 없다. ‘세계 최고의 독서가’란 별명을 가진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알베르트 망구엘은 ‘밤의 도서관’에서 책을 가나다순, 지역이나 국가, 표지 색깔, 책의 크기와 장르뿐 아니라 심지어 구입일자와 출판일자에 따라서도 분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랭 드 보통은 미술관이 예술 본연의 기능인 ‘치유와 구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구체적 작품을 통해 균형감을 회복해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전시실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는 책장 정리에도 유효한 통찰을 준다. 예를 들면 ‘영혼의 치유와 회복’이라는 감정선에 따라 책을 분류해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 들었던 사례도 흥미롭다. 시인 출신인 한 출판인은 침실 책장에는 무조건 시집만을 비치해 둔다고 했다. 그 사적이며 신성한 회복의 공간에는 ‘순도 100%’ 시의 언어가 아닌 책은 감히 책장 한 장 들이밀 수 없다는 뜻이다. 반면 거실에는 인테리어 효과를 낼 수 있는 화집이나 디자인북 등 화려하고 큰 책을, 서재에는 검토해야 할 책들을 둔다고 했다.
한때 엄격한 ‘듀이 모델’ 신봉자였지만 책 정리에 한 가지 절대 모델이란 없음을 알게 된 후 나 역시 책장 관리에 보다 창의적이고 유연한 방식을 적용 중이다. 요즘은 ‘독자 키’ 기준으로 책을 분류한다. 거실 한편을 차지한 책장을 어른들 책으로만 채워두는 게 탐욕스럽게 느껴져 세 번째 칸까지 비우고 아이들에게 내어줬기 때문이다. 날이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이 부쩍 “네 번째 칸까지 손이 닿는다”며 은근한 압박을 해온다는 게 이 분류법의 숙제다.
- 2025.04.19 동아일보 박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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