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7-10 10:36
[시각] 덩치는 작아도 肝은 초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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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력 없이 선전하는 작은 출판사들]

규모의 경제 휩쓰는 출판계… 선구안·기획력만으로 승부


박돈규 기자
정유정이 쓴 장편소설 '내 심장을 쏴라'는 2009년 세계문학상 당선작이다. 하지만 고료를 내기로 했던 출판사가 난색을 표하며 주최 언론사는 '상금 1억원'을 선인세 형태로 지급하는 출판사를 찾아 나섰다. 문학 전문 출판사들이 줄줄이 거절했고, 작은 규모의 출판사 은행나무가 1억원을 내고 작품을 출간했다. 주연선 대표는 "신선하고 재미있다는 믿음만으로" 출간했다. 6개월 만에 8만부가 팔렸다. 정유정의 히트작 '7년의 밤' '28'도 이 출판사에서 나왔다.

스포츠 스타의 책 중 유일하게 10만부를 넘긴 홍명보의 '영원한 리베로'(25만부)는 월드컵 이전, 소설·만화·동화 '대장금'은 드라마 방영 전 이 출판사가 계약한 책이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 '우리는 사랑일까',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공중그네'도 선인세 몇 백만원에 잡았다.

차별화된 음식 전문서를 내는 따비 출판사, 출판문화산업진흥원 기획안 공모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통영의 남해의봄날 등 최근 작은 출판사의 약진은 고무적이다. 직원 10명 안팎인 출판사가 '골리앗'과 싸우려면 앞질러 기획하거나 새 분야를 개척해야 승산이 높아진다. 이들을 지켜본 출판인은 "낯선 작가나 책을 출간할 때 특히 이들 출판사의 역량이 빛난다"고 말했다.

따비는 음식 전문 출판사지만 맛집 기행 같은 유행서 대신 사진 한 장 없는 '미각의 제국'이란 책을 냈다. 정갈한 문장으로 미각을 돋운다. 올해 나온 '서울을 먹다'도 같은 콘셉트다. 박성경 따비 대표는 "10년 뒤에도 낡은 느낌이 나지 않는 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10억원 이상의 선인세, 50%를 넘는 할인 경쟁, 조직적인 사재기…. 규모의 경제가 점점 출판을 지배하고 있다. "몇몇 작가의 선인세가 100~1000배까지 올랐으니 출판은 주식이나 부동산보다 수익성 높은 '로또'"라는 씁쓸한 자조(自嘲)도 들린다. '타율(1만부 이상 팔리는 책)'에 몰입하지 않고 "차별화된 콘텐츠라면 당장 판매되지 않더라도 낸다"는 고집을 지닌 작은 출판사의 등장이 그래서 반갑다. 비싼 몸값 주고 수입한 홈런 타자를 1위에 올려놓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대형 출판사들의 간(肝)보다는 그들의 간이 훨씬 크고 건강하다.

- 조선일보 2013.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