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0-18 10:07
독자 부려먹는 출판사? 재밌으면 그만 아닌가요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07522.html [714]
[문화‘랑’] 나도 문화인
<20> ‘북스피어’ 김홍민 대표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
일본 인기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추리소설 등 다양한 장르문학을 전문적으로 내는 출판사 ‘북스피어’ 사무실에는 이 글을 새긴 쿠션이 여러개 놓여 있다. 회사 블로그에도 이 글귀가 맨 처음 등장한다. ‘재미있는 책을 펴내자’란 뜻만은 아니다. 스스로를 ‘마포 김 사장’이라고 부르는 김홍민(37) 대표는 이렇게 설명한다. “책을 매개로 ‘남들이 안 하는’ 재미있는 이벤트를 하자는 겁니다.”
그동안 북스피어가 벌여온 일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직원 3명인 이 작은 출판사는 2005년 설립 뒤 각종 이벤트로 출판계의 화제가 됐고, 출판사 자체를 좋아하는 마니아 독자들을 만들어왔다. 북스피어의 이벤트는 독자에게 사은품 따위를 주는 게 아니다. ‘독자를 부려먹는’ 이벤트다.
북스피어는 2005년 8권짜리 <아발론 연대기>를 출간했다. 그런데 전문 교정 인력을 쓰려니 1000만원이 든다는 거다. 김 대표는 아이디어를 냈다. “블로그에서 독자들에게 교정을 봐 달라고 했어요. 미출간 책을 가장 먼저 볼 수 있고, 수고비로 책 한 질을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죠.” 결과는 대성공. 번역가 지망생, 교열가 지망생 등까지 몰려 경쟁률이 8 대 1에 이르렀다. 이후 북스피어의 모든 책은 ‘독자 교정단’의 손을 거친다.
오디오북을 만들 때도 독자들 중 지원자를 구했더니 성우 지망생이 몰려들었다. 그는 “단순히 독자들을 부려먹자는 차원이 아니라 독자들과 소통하는 출판사를 만들고 싶었다”며 “이후 독자 교정단과 1박2일로 여행도 가고, 축구 구경도 가면서 관계가 더 돈독해졌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친해진 독자들이 종종 간식, 쿠션, 감자 등을 선물로 보내주니 아이돌 못지않다고 그는 자랑을 늘어놓았다.

지난 3월 북스피어가 자체적으로 만든 파격 광고. 김 대표는 한 남성잡지 화보를 보고 아이디어를 낸 뒤 3개월 다이어트 끝에 직접 모델이 됐고, 한 여성 독자가 자발적으로 상반신 탈의를 감행했다. 북스피어 제공
그는 처음에는 아이디어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출판사에 2년 다니다 처음 창업했을 때는 마케팅의 ‘마’ 자도 몰랐다고 한다. 창업 직후의 일이다. “누가 ‘잡지처럼 책에 헤어무스 같은 걸 붙여서 팔아보라’고 하길래 정말로 무스 3000개를 붙였는데, 전혀 안 팔렸어요.” 이후 그 무스는 김 대표가 5년 동안 써야 했다. 학창시절에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학생이었고, 심지어 대학 갈 마음도 없었다고 한다. “어느 날 친구 과외 선생님이 대학생들은 ‘엠티 가서 남자·여자 떼거리로 혼숙도 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학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으흐흐.” ‘재미없는 사람이었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다.
‘‘난’ 3류, 재미 없으면 의미도 없어
‘독’ 자 참여하는 교정 마케팅 대박
‘신’ 나는 이벤트로 마니아층 형성
‘남’ 들도 따라하는 것 보면 뿌듯해
마케팅을 고민하던 그에게 결정적 계기가 찾아온 것은 창업 2년 뒤인 2007년 말이었다. 빌 밸린저가 1950년대에 쓴 추리소설 <이와 손톱>을 출간하면서 당시 미국에서 했던 마케팅을 그대로 따라해 봤다. “범인이 밝혀지는 마지막 장을 봉인한 뒤 ‘호기심을 참고 봉인을 뜯지 않은 채 가져오면 책값을 환불해준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와~, 사람들이 같은 책을 두 권씩 사는 거예요. 한 권은 읽고 한 권은 소장하려고. 순간 머리에 섬광이 스치더군요.”
그때부터 그는 이벤트를 궁리했고, 발랄하고 독특한 아이디어들이 이어졌다. 책에 대한 비정기 간행물 <르 지라시>(르몽드+찌라시란 뜻) 발행, 책 띠지 속 글자와 이미지를 모아 문장을 만드는 ‘이스터 에그’(이 기사의 부제 첫 글자들을 아래로 읽으면 문장이 만들어지는 식으로 재미를 내용 안에 숨겨놓는 장난을 말한다) 놀이, 자신과 독자가 함께 누드 사진을 찍어 광고물 만들기 등의 이벤트를 벌였다. 정점을 찍은 것은 독자들에게 마케팅 비용을 모금했던 북펀딩 ‘원기옥’ 이벤트. 만화 <드래곤 볼>에서 에너지를 모아 무기로 쓰는 ‘원기옥’ 기술에서 따온 이름이다. 첫 북펀딩에서 11일 만에 목표액 5000만원이 모였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는 책을 내 돈 벌고 싶어 이벤트를 하는지, 재미있는 이벤트를 하기 위해 책을 내는지 모르는 상태에 빠져들었다고 고백했다. “제가 하는 모든 이벤트는 ‘쌈마이’(3류)고 찌질합니다. 뭐 어때요? 재미없는 것보다 낫지.”

서울 홍대 주차장 골목에서 열리는 책 판매행사 와우북페스티벌에 참여한 북스피어의 부스. 매년 톡톡 튀는 글을 쓴 족자를 걸어 눈길 을 끈다. 북스피어 제공
최근에는 북스피어 이벤트가 유명해지면서 벤치마킹하는 곳도 종종 생겨난다. 김 대표는 “작은 출판사들이 따라하면 뿌듯한데, 대형 출판사들이 베끼면 너무 얄밉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대형 출판사가 모든 것을 싹쓸이하려고 하는데, 북스피어처럼 소규모 전문 출판사들이 많아야 건강한 출판 생태계가 유지된다고 믿어요. 계속 이벤트를 벌이는 것도 소규모 출판사의 생존법을 고민하는 방편인 거죠.”
그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 단기적으로는 독자 교정단을 이끌고 일본에 가 <북스피어>의 1등 작가 미야베 미유키와 모임을 갖는 것, 장기적으로는 미국·유럽엔 많지만 한국엔 단 한 곳도 없는 ‘장르문학 전문서점’을 여는 것이 꿈이란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 한겨레신문 2013.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