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 런던특파원
한국식 의전은 전염성이 강했다. 찰스 영국 왕세자의 부인인 카밀라 콘월 공작부인이 곧 런던도서전 한국관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영 관계자들이 일렬로 도열했다. 한 영국 인사가 “이렇게까진 안 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 역시 이내 분위기에 압도됐다.
카밀라 공작부인은 5분 정도 머물렀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저자인 황선미 작가와 인사를 나눴는데 황씨가 작가란 사실만 안 게 분명했다. “주로 뭘 쓰나”고 물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동화작가라고 답하자 “아동들이 책을 읽게 하는 게 중요하다. 굉장히 좋은 일을 하고 계시다”고 했다. 여타 언어로도 출판됐다는 얘기엔 “훌륭한 일(It’s great)”이라고 하곤 “(영역본을) 내가 읽고 손자들에게도 읽어 주겠다”는 말을 남겼다.
황 작가는 카밀라 공작부인이 올 도서전에서 만난 유일한 작가다. 이유는 짐작할 만했다. 전시장 입구에 런던도서전이 꼽은 ‘오늘의 작가’ 세 명이 대형 사진과 함께 소개돼 있는데 황 작가가 그중 한 명이었다. 더욱이 ‘오늘’이 딱 카밀라 공작부인이 도서전을 방문한 날(9일)이었다. 만일 도서전 기간 중 다른 날, 즉 8일 또는 10일 찾았다면 다른 작가를 만났을지도 모른다.
사정이 이럼에도 카밀라 공작부인의 방문은 한국 측 인사들에게 묘한 안도감을 줬다. 도서전을 계기로 한국 작품들이 영국 서점가에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식으로 한국에 알려져 대개들 감정적 갈등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동화가 영 베스트셀러 1위’란 제목의 기사가 나오는가 하면 한 작가의 작품도 범죄소설 분야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는 식으로 보도됐다.
『마당을 나온 암탉』이 베스트셀러인 건 맞다. 그러나 1위까진 아니다. 물론 1위를 한 서점이 있긴 하지만 우리로 치면 서울의 남부터미널점쯤 되는 곳이다. 우리가 서점 한두 곳에서 1위 했다고 ‘베스트셀러 1위’라곤 말하지 않지 않나. 실제 종합순위 90위권이다. ‘범죄소설 베스트셀러’도 곧이곧대로 ‘아주 잘 팔린다’로 해석하면 사실과 동떨어진 얘기가 됐다.
이러니 가만히 있기 뭣했다. 그렇다고 “과장이다”고 대놓고 말하기엔 남 잘되는 일에 재 뿌리는 듯했다. 하지만 카밀라 공작부인의 등장으로 다들 마음을 정했다. “영국 왕실이 찾을 정도로 한국이 잘나가는 건 사실”이란 쪽으로였다. 실상이야 어떻든 말이다.
도서전에서 뭉클했던 순간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카밀라의 방문 때도, 영국 인사들의 극찬을 들을 때도 아니었다. 한국 작가들의 진솔한 얘기를 들을 때였다. 특히 이승우 작가가 “지금부터 글을 쓸 수 없다면 무슨 일을 하겠는가”란 질문에 큰 충격을 받은 듯 잠시 말을 잃었다가 “쓸 수 없다는 걸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읽을 순 있겠지요? 읽을 순 있을 거예요”라고 답하며 안도하던 모습이 강렬했다. 이렇게 문학하는 이들이 있어 오늘의 한국 문학이 있는 게다. 이들을 욕되게 하는 분칠은 삼가자.
고정애 런던특파원
-중앙일보 201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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