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1)울산서점협동조합이 지원하고 있는 ‘인문학 서재 몽돌’의 ‘저자와의 만남(사진 위)’ 행사 참가자들이 사인을 받고 있다.
(사진2)예비 사회적기업 이익금으로 운영되는 문학기행 프로그램인 ‘달빛누리’에 참가한 시민들이 문화재 설명안내문을 읽고 있다. / 울산서점협동조합 제공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추억의 동네서점이 사라지고 있다. 인터넷 서점과 대형서점의 높은 파고를 이겨내지 못한 동네서점이 문을 닫으면서 지역 문화의 교두보가 무너지고 있다. 하지만 전시회와 공연을 유치해 손님과의 줄을 놓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생기면서 예전 영광을 되찾으려는 동네서점도 생겨나고 있다.
◆줄줄이 폐점, 명맥 끊기는 동네서점
충남 천안시 천안역 앞에는 50년 가까이된 ‘동방서림’이 있었다. 충남 시·군 지역에 책을 공급하는 도매상 역할을 했고, 지역의 랜드마크였다. 지역의 사회·문화·예술 단체를 지원하고 예술인을 발굴·육성하는 데도 앞장섰다. 하지만 변화하는 유통구조에 경영난을 겪으며 1997년 문을 닫았다. 전남 순천시 연향동의 비교적 규모가 큰 서점인 ‘서원문고’는 지난해 4월 말 임대계약이 만료된 뒤 자리를 옮긴다고 알렸지만, ‘이전 개업’ 소식은 아직까지 들리지 않는다.
40여년간 대전 원동 중앙시장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했던 한 서점은 주인 아들이 ‘수익성이 없다’는 이유로 물려받길 꺼려하면서 최근 이불가게로 간판을 바꿨다. 34년째 원동에서 서점을 운영했던 송모(60)씨는 “소일거리 삼아 하고 있을 뿐 돈 벌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했다”며 “수년째 먼지만 쌓이고 있는 사전이나 전문서적을 보면 서글픈 생각이 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인구가 밀집한 신도시의 서점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인구 10만명인 부산 해운대 신도시에 위치한 ‘신도서점’은 이달 초 18년 만에 폐업했다. 개점 직후 수년간 이 서점의 연매출은 7억∼8억원. 그러나 인터넷 서점 활성화로 지난해엔 연매출이 반토막 났다. 서점대표 정규봉(57)씨는 “임대료와 관리비를 제외하면 한 사람 인건비도 나오기 어려워 결국 폐점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개성으로 부활을 꿈꾸는 동네서점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전문서점부터 책 전시회, 음악 공연, 악기 레슨 등 다양한 아이디어로 생존경쟁에 나선 동네서점의 부활의 날갯짓이 눈길을 끌고 있다.
부산시 수영구 남천동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서점인 ‘인디고서원’이 대표적이다. 청소년들이 찾는 서점이지만 참고서와 문제집은 단 한 권도 없다. 베스트셀러 목록도 철저히 무시한다. 4월의 추천도서는 ‘말의 정의’(오레 겐자부로),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백석), ‘바그다드 우편배달 소년’(마르코스 S.칼베이로) 등이다. 모두 서점주인 허아람(41)씨가 선정한 것이다.
서점이지만 책만 파는 곳이 아니다. 지하 소극장에서는 매달 둘째, 넷째 수요일에 ‘수요독서회’가 열린다. 매달 한 차례 열리는 세미나인 ‘주제와 변주’는 저명한 필자들도 학생들과의 만남을 위해 기꺼이 찾아 강의를 한다. 그동안 박원순 서울시장과 시사평론가 진중권, 조국· 도정일교수, 시인 김용택, 소설가 성석제씨 등이 다녀갔다. 청소년들이 기획한 청소년 토론의 장 ‘정세청세’는 매년 두세 차례 진행된다.
허씨가 인디고서원을 구상한 건 2004년 8월쯤. “비판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책을 통해 이 땅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정신적 토양을 제공하겠다”는 생각에서다. 7년이 지난 현재 인디고서원은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찾는 ‘전국구’ 동네서점이 됐으며, 사라져가는 동네서점의 대안 모델이 됐다.
충북 충주시 ‘책이 있는 글터’는 다양한 문화이벤트로 동네 문화 사랑방으로 자리잡은 곳이다. 서점 건물 옆 공터와 서점 건물 3층에 마련된 100㎡ 남짓한 문화공간 ‘숨’에서는 나눔장터가 열리고, 하모니카 연주모임과 교육철학 공부모임 등 매일 다양한 모임이 이뤄진다.
공간 사용료는 없다. 글터를 찾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인문학 강연 프로그램과 악기 레슨, 작품 전시 등도 진행된다. 동네 미술학원 아이들이 만든 로봇이나 그림이 전시품일 때도 있다. ‘읽어주는 책방’이라는 코너는 이 서점만의 특징이다. 전시된 책을 읽어달라 직원들에게 신청하면 전문 성우들이 읽어준다. 지난해에는 연극하는 동아리 회원들이 책을 직접 읽어주기도 했고, 책 내용을 중심으로 한 연극을 하기도 했다.
동네서점끼리 똘똘 뭉쳐 활로를 모색하는 곳도 있다. 울산지역 23개 동네서점이 모여 지난해말 설립한 ‘울산서점협동조합’이다. 공동구매를 통해 각 서점들이 개별적으로 출판사에서 구입할 때보다 싼 값에 책을 사들여 가격 경쟁력을 높인다. 사들인 책을 각 서점에 배달해주는 물류대행을 하고, 울산시와 지역 학교, 공공도서관, 작은 도서관 등에 필요한 도서를 공급해 수익을 낸다. 지난 5개월간 1억 정도의 매출이 발생했다. 올해는 매출 8억원을, 내년엔 10억원 이상을 달성할 계획이다.
박세기(57) 이사장은 “2년 전 한 달에 울산지역 동네서점 4곳이 문을 닫았다. ‘이대론 안 된다’는 위기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협동조합을 설립하게 된 이유였다. 하지만 책값 덤핑이 여전한 도서 입찰에서 협동조합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지난해 7월 ‘공공기관 우선 구매제도’ 혜택이 있는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눈을 돌려 지난해 7월 지정됐다.
앞으론 동네서점과 주민들의 스킨십을 늘리기 위해 조합원들이 운영하는 동네서점에서 작가와의 만남, 사인회, 시 낭송, 동화구연 등의 문화행사를 진행할 계획이다. 소비자가 동네서점에서 구매한 책을 다시 서점으로 가져오면 원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서점이 재구매하고 이 책을 다시 중고책으로 재판매하는 ‘북오프 운동’, 동네서점을 연계한 ‘온라인 서점’을 추진해 바뀐 시장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예정이다.
부산·청주·울산=전상후·김을지·이보람 기자 bora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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