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출판 일업(一業)으로 살아오신 일조각(一潮閣) 한만년(韓萬年) 회장의 십주기일이 지난 오월초하루였는데, 이날을 하루 앞서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선영에서 그 어른을 위한 묘비 제막식이 조촐하나 의미 깊게 열렸다.
후학과 후손들이 힘을 모아 세운, 근래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묘비명(墓碑銘)의 이런 글귀가 눈길을 끈다. “부군(府君)은 성품이 온화하고 용모와 자질이 뛰어나 주위에 사람이 많았으며, 어려운 사람을 남몰래 도왔다. 틈틈이 쓴 글을 모은 책을 ‘일업일생(一業一生)’이라 제(題)했듯이, 정치권의 유혹도 받았으나 평생을 출판인으로 자부하며 살았다.”
말과 글, 문자가 올바로 서야
출판계의 큰 어른이셨던 그분을 뵌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 년이라니! 화창한 봄날, 무덤 앞에 서서 한동안 묘비명을 읽는다. 역시 출판 일업으로 한평생을 살아온 나의 가슴엔 만감이 교차한다. ‘책은 왜 만드는가, 책이란 과연 무엇인가.’ 평생 책 만들기를 소명으로 부름 받은 듯 미련하게 살아왔으되, 그 일이 이 사회와 나라에 과연 어떤 의미로 남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새삼 심사(深思) 한 귀퉁이에서 솟구친다.
평소 수인사(修人事)를 나눌 때 이웃들은 내게 “출판사업 잘 됩니까” 하고 물어 온다. 여기서의 ‘사업’이란 일업일생에서의 ‘업(業)’일진대, 이는 단순한 ‘장사’를 일컬음이 아닐 터이다. 나는 평소 ‘말’ 가지고 장사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는 신념을 지닌, 일견 고지식하고 순박한 이상주의자다. 똑똑한 경세가들 앞에선 변변찮은, 좀 용렬(庸劣)한 인간인 셈이다. 한데, 나의 이런 생각이 과연 답답함이요 용렬함일까. ‘말’ ‘언어’ ‘문자’ ‘글’들은 인간이 창안한,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도구요 수단 아닌가. 이런 소중한 도구가 시장의 논리에 맡겨졌을 때 오는 피해를 한번쯤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한만년님의 선영을 막 다녀온 엊그제 휴일 날, 나는 홀로 열화당 책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출판계 선배들의 자전적 저술들과 그분들에 관한 책들을 추려서 쌓아 놓고, 하염없이 뒤적이고 있었다. 생존해 계실 때 서슬이 퍼렇도록 임하시던 그 존재감은 온데간데 없으시구나! 이처럼 허망하시다니! 나의 가슴은 형언할 길 없는 슬픈 감정에 휩싸여 책장을 넘기고 또 넘기고 몇 시간을 보낸 끝에야 비로소, 이분들이 우리 역사에 조용히 편입되어 굳건히 존재해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산기(山氣) 이겸로(李謙魯)님의 ‘통문관 책방비화’, 을유문화사 은석(隱石) 정진숙(鄭鎭肅)님의 ‘출판인 정진숙’, 남애(南涯) 안춘근(安春根)님의 ‘고서의 향기’, 정음사 최영해(崔暎海)님의 속살까지 드러내 주는 ‘세월도 강산도’, 그리고 ‘일업일생’ 등, 자랑스러운 출판인들의 책이 호젓한 서가 한켠에 말없이 계신다. 올바른 말의 문화를 세우기 위해 평생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역사의 저편을 향해 걸어가시어 여기 나의 서가에 오롯이 꽂혀 계신 이들이여! 그러나 그분들은 결코 외롭지 않다. 아니, 외롭지 않아야 한다.
국가발전에 책의 역할 커
나는 “말이 서야 집안이 선다”는 말씀을 귀 아프도록 들으며 자랐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말이 서야 나라가 선다”던 함석헌(咸錫憲) 선생님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이는 책이 올바로 중심을 잡아야 한 나라의 문화와 전통, 교육과 법과 정의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다는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 소중한 일을 소홀히 하면서 현세적 탐욕에 매몰돼 온 민족에게는 엄청난 불행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터이다. 나라가 통째로 부실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말, 언어, 문자, 글, 기호들이 올바로 서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들이야말로 온 사회의 근저를 이루는 요소이기에.
[국민일보2014.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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