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3-08 09:59
영원한 벗 교보문고여!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303/h20130307210029121760.ht… [687]
그대를 만난 지도 벌써 수십 년이 흘렀구려. 아, 수십 년 알고 지낸 이가 적지 않으니 햇수로만 그대와의 인연을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구나.

그대는 늘 그곳에서 아프고 절망하고 부족함에 눈물 흘리던 나, 그리고 이웃들을 기다리고 있었지. 변치 않는 자세와 한결같은 마음가짐으로. 그 고마움을 어찌 한 장의 편지로 표현하겠는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그대의 좌우명이 시대의 좌우명으로 자리한 그 시대에 우리는 그대의 가르침 그대로 살았지. 그래, 요즘 살기가 어떠하신가?

책이라는 단어는 스마트폰이라는 오락기에 밀려 이제 ‘고어사전’에서나 찾아보아야 할 지경인데다, 돈과 부자라는 단어가 홍수를 이루어 밀어붙이는 이 시대에 그대가 느끼는 고통이 어떠할지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네.

그뿐인가? 그대와 같은 실재서점(이걸 고상한 자들은 오프라인 서점이라고 하더군. 오호, 세종이시여!)은 가상서점(이건 온라인 서점이라고 하나?) 이용자들에게 고작 전시관 노릇이나 해야 하는 오늘날, 그대가 품고 있는 수백만 권의 책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그대의 절망이 그대로 전해오는 듯하구려.

이쯤 되면 그대는 책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기능은 포기하고, 단 한 권의 책도 보여주지 못하는 가상서점을 위해 책의 전시관, 진열장 노릇에 만족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당연히 그대를 찾는 이들에게 전시관 입장료를 받아야 할 테고 말이지. 그러나 그대가 그런 삶을 선택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수십 년에 걸친 그대와의 교류를 통해 익히 알고 있지.

결국 그대는 시대의 흐름에 의연히 맞서고, 나아가 이 경제의 노예, 무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겠지. 그대의 문경지우(刎頸之友)인 출판계와 갈등을 일으키며 전자책 사업의 새로운 방식을 도입한 것 또한 마지막 생존의 몸부림인 걸 내 왜 모르겠는가. 이 모든 힘겨움이 이제는 거의 사라진 실재서점의 마지막 보루로서 어떻게든 생존하는 것만이 그대의 사명이라는 처절한 깨달음 때문이라는 걸. 그러나 친구, 우리 솔직히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는 게 어떤가.

이 시대가 진정 책을, 출판계를, 실재서점을 필요로 한다고 여기는가? 그대의 공간을 고급 식당가로 변모시켜 부동산업자로 편히 살 수 있는 길을 포기한 채 묵묵히 소명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의지를 과연 누가 이해해줄 것이라 여기는가.

오늘 아침신문은 그대와 나, 모두에게 절망적이지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기사를 전해주더군. 대한민국 시민의 도서구입비가 9년 전에 비해 30% 가까이 줄어들었다고. 그 기간, 소득은 50% 이상 늘었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이제 깨달았다네. 이 시대는, 우리와 함께하는 이웃들은 더 이상 지성과 철학과 염치에 가치를 두는 대신, 돈과 천박한 명예와 성공에 목을 매달고 있음을 말이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책장이 아니고 금고요, 책이 아니라 통장임을.

그런 시대에 내 어찌 수십 년 벗인 그대의 좌절과 고통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그대여! 교보문고여!

이제 그 힘든 짐을 내려놓게나. 그 정도 했으면 할 만큼 했네. 그대가 수십 년 동안 키워온 대한민국의 지성, 철학의 소명 또한 다 되었지. 그러니 그대 또한 편한 길을 가게나. 그러면 이 나라, 이 사회, 이웃들은 어떡하느냐고?

그건 그들 몫이네. 서점도 장사니 알아서 살아남거나 망하거나 네 몫이라고 명령하는 그들의 몫이네. 책도 상품이니 정가 따위를 정해주는 건 불공정거래요, 따라서 팔리지 않는 상품을 만들고 다루는 자들 또한 망하는 게 당연하다고 정의하는 이 시대의 몫이란 말이지.

나는 그대, 교보문고 없는 우리나라를 상상하기 힘드네. 정말 그대가 사라진다면 나는 아마 숨 쉴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겠지. 그러나 나 하나의 안위를 위해 그대가 이토록 고통 받으며 생존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더욱 견딜 수 없네. 그대, 교보문고여! 함께 사라지세. 지성과 철학을 버린 이 시대를 떠나세.

그리하여 아무도 없는 먼 곳, 오래된 미래의 장소에 가서 우리끼리 한 잔 술을 나누며 향기 가득한 책을 펼치세. 더없이 아름다운 친구여, 교보문고여!

(김흥식 서해문집 대표)

- 한국일보 2013.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