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3-19 16:13
책, 벼랑끝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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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책 유통은 한마디로 유통구조라 할 수 없습니다. 약육강식의 정글의 법칙만 존재하는 것 같아요.”

광주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박세종 씨는 “골목서점은 사교육 참고서로 먹고사는데 정가의 75~80%를 현금으로 주고 받아왔다”며 울분을 토했다. 이제 동네서점에서 소설이나 시집을 사는 독자는 없다. 겨우 참고서로 연명하고 있지만 이마저 위태위태하다. 진흙탕 할인경쟁에 배겨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내몰린 건 동네서점만이 아니다. 책 생태계 전체가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지난해 월 평균 가구 책 구입비는 1만9026원으로 전년 대비 7.5% 감소했다. 신간도서 발행종수는 3만9767종으로 9.7% 감소, 발행부수는 8690만부로 20.7% 감소, 신생 출판사 20% 감소….

출판 지표들이 모두 곤두박질치고 있다. 책의 핏줄 역할을 해온 동네서점은 지난 10년 사이 5000개에서 1500개로 줄어 골목길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렇다면 온라인 서점은 훨훨 날았을까. 온라인 서점의 성장률은 인터넷 서점이 생긴 이래 12년 만에 처음으로 꺾였다. 지식산업의 근간으로 한국성장의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해온 출판계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스마트폰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확산으로 독서문화가 위축된 데다, 출판계가 경제 논리와 할인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결과라는 게 이들의 목소리다. 특히 현행 도서정가제는 이를 방치, 조장해온 측면이 있다. 발행일로부터 18개월 미만인 도서(신간도서)는 현행법상 19%까지 할인이 가능하다. 18개월이 경과한 도서(구간도서)와 실용서, 초등학습참고서 및 국가기관 등에서 구입하는 도서는 할인이 무제한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반값, 60% 할인 도서가 횡행하고 오프라인 서점 매대에서 신간 도서가 사라지고 있는 이유다. 반값에 살 수 있는 구간도서 비중이 높아지면서 출판사들은 새 책 내길 꺼리는 게 현실이다.

출판계가 올 초 유명무실한 도서정가제를 바로잡기 위해 모든 도서에 일률적으로 10% 할인율을 적용하는 도서정가제 개정안을 국회에 내놓은 상태지만 논의조차 못하고 있다. 이에 출판사들이 왜곡된 시장을 바로 잡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최근 한국출판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 출판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우선 대형출판사의 반값 덤핑을 지목, 이에 강력 대응키로 했다. 비대위원장 고정일 동서문화사대표는 “출판을 파괴하고 있는 주범은 우리 출판인 스스로다”며, “상습 덤핑을 해온 대형출판사를 덤핑 및 편법 거래 등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조만간 고발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비대위는 반값 덤핑을 하는 서점에는 책 공급을 중단하는 출판사 서명운동도 벌일 예정이다.




“도서정가제” 한목소리…갈길은 멀다
지금 출판계는 어수선하다. 책을 만든다는 오랜 자부심과 동료의식으로 독특한 지식생태계를 조성해온 출판동네가 할인경쟁과 덤핑, 편법, 자본이 판치는 서바이벌 게임의 장으로 변하면서 살벌해졌다. 유통구조는 망가지고, 독자는 책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그동안 힘들어도 꿋꿋이 버텨온 출판사는 이제는 잘못된 제도와 관행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산재한 현안은 만만치 않다.

▶도서정가제, 실현 가능성은?=출판생태계를 복원하는데 도서정가제 실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에는 출판계가 인식을 같이하고 있지만 갈 길은 멀다.

지난 1월 9일 도서정가제를 확대하는 내용의 출판문화산업진흥법 개정안이 발의되자 온라인 서점 알라딘이 정가제 확대에 반대해 온라인 서명운동을 벌였다가 출판사로부터 줄줄이 거래 정지를 당하는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국회에서 도서정가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경우 할인폭을 놓고 다시 들썩일 가능성도 있다. 특히 현행 도서정가제에서는 추가 할인 대상과 범위를 공정거래법에서 규제하고 있지만 개정안에서는 삭제했기 때문에 공정위의 반발도 예상할 수 있다.

▶전자책 시장, 대여제 변수=종이책 시장의 침체가 이어지면서 출판사와 서점이 활로를 모색하는 분야가 전자책이다. 전자책 시장은 전체 도서시장에서의 비중이 2%에 불과한 만큼 성장여력이 큰 게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책시장의 뜨거운 감자로 등장한 게 교보문고의 전자책 회원제 대여서비스인 ‘sam(샘)’이다. 전자책을 낱권으로 구매하는 것과 달리 연회비를 내면 금액에 따라 전자책을 일정 기간 대여해 볼 수 있는 방식으로 낱권 전자책의 반값 수준이다.




60여개 회사가 출자해 설립한 한국출판콘텐츠(KPC)측은 “전자책 시장이 활성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반값 전자책 대여는 시장을 왜곡시킬 수 있다”며 비판 성명을 냈다.

실제로 KPC 소속 출판사의 상당수는 샘에 참여하지 않거나 소극적이다. 샘의 성공 여부에 따라 전자책 시장은 한 차례 요동칠 것으로 보인다.

▶동네 서점 vs 대형 서점 규제=동네 서점이 온라인 서점에 맞설 수 없는 건 할인 탓이 크지만 출판사의 거래행태도 문제가 있다.

황선옥 소비자시민모임 이사가 최근 서점 형태에 따른 도서의 판매가격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온라인 서점의 매입가격은 정가의 50~60%, 지역 서점은 60~75%로 온라인 서점이 지역 서점에 비해 10~15% 싸게 매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구조에서 할인까지 내세우면 동네 서점은 버텨낼 재간이 없다. 이에 따라 지역 서점, 대형 서점, 온라인 서점의 동반성장을 위한 지역별 대형 서점 진출 제한, 판매품목 구별 등 유통과정 개선 논의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의 출판정책 어디로?=MB정부 시절 출판산업 5개년 계획을 만들고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을 중심으로 출판산업 활성화를 꾀해 나간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추동력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국가지식산업 발전이란 큰 그림에서 정책이 추진되지 못한 채 수백가지 지원정책이 제각각 조각난 채 이뤄지고 있다. 무엇보다 좋은 콘텐츠가 나올 수 있는 환경마련과 공급할 수 있는 유통채널인 서점 살리기, 독서 진흥의 3박자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출판산업은 단순히 책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지식산업, 창조산업의 근간이라는 인식을 정부가 우선 갖는 게 중요하다”며 출판의 공적 기능을 중시해 출판산업의 전략적 육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 헤럴드경제 2013.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