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종로서적은 누구나 자유롭게 책을 꺼내 읽어도 괜찮은 곳이었다. 그 무렵 출판사는 책에 비닐 표지를 씌워 출간했다. 종로서적 직원들은 손님이 책을 골라 계산대에 오면 비닐 표지를 벗겨냈다. 김홍도의 서당 풍속화가 담긴 종이 포장지로 책을 싼 뒤 다시 비닐을 씌워줬다. 종로서적 포장지는 아련한 추억의 기호(記號)다. 2002년 종로서적이 문을 닫으면서 '이제는 사라진 것'이 됐다.
▶2010년 부산에서 55년 된 문우당서적과 30년 된 동보서적이 문을 닫았다. 인터넷 서점에 손님을 빼앗기면서 적자를 이겨내지 못했다. 2011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사라지는 것들'에 두 서점의 기억이 담겼다. '약속 장소를 동보서적으로 잡아 기다리던 시간에 책을 봤던 기억, 여행 지도를 구하러 문우당까지 찾아가던 일들 따위가 낡은 앨범의 사진을 뒤지듯 지나갔다.' 향토 서점을 잃은 부산 사람들의 허탈함이 짙게 배 있다. 문우당은 반년 뒤 규모를 10분의 1로 줄여 해양 전문 책방으로 되살아났지만 동보서적은 돌아오지 않았다.
▶광주 금남로에서도 2000년대 들어 서점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작년엔 유서 깊은 충장서림이 문을 닫았다가 매장 규모를 줄인 끝에 석 달 만에 살아났다. 지난해 8월 군산에선 유일한 대형 서점 한길문고가 없어질 뻔했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책방이 잠겨 책 10만권이 몽땅 물휴지가 됐다. 비가 그치자 이 책방을 사랑하던 시민들이 모여들어 흙탕물을 헤치며 책을 끄집어냈다. 50일 동안 자원봉사자 2500명이 책방을 청소하고 정리했다.
▶25년 된 한길문고는 문화 공간 구실을 꾸준히 해 왔다. 김용택 시인을 비롯한 저자 강연회를 열고 독서 운동도 벌였다. 시민들은 그런 책방이 사라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고 했다. 한길문고가 다시 문을 열면 책을 살 수 있는 '바우처'도 만들어 2000만원어치를 팔았다. 그래도 물에 젖은 책은 되살릴 수 없었다. 한길문고 주인은 서점을 접으려 했다가 용기를 얻고 다시 문을 열었다.
▶2000년 3400곳이 넘었던 전국 서점은 지난해 1700개까지 줄었다. 동네 사람들의 추억이 서린 향토 서점이 많이 사라졌다. 그런 내리막길에서 군산 한길문고는 지역 서점이 사는 길을 밝혀줬다. 책 내음만 맡아도 행복해지는 곳. 책을 뒤적이면서 도란도란 정도 쌓고 추억도 맺는 곳. 책과 책방을 사랑하는 이웃들이 있는 한 서점은 꿋꿋이 버텨나갈 수 있다는 것을 군산 한길문고가 보여줬다.
- 조선일보 2013.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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