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시인 백석이 번역한 토머스 하디 원작 ‘테스’가 73년 만에 재출간된 것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깨우기만큼이나 극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재출간의 주역인 최동호 고려대 국문과 교수에 따르면 백석 번역으로 추정되는 ‘테스’가 서강대 로욜라도서관에 소장돼 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은 지난해 8월이다. 그는 황화상 서강대 국문과 교수에게 ‘테스’를 복사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서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복사본이 수중에 들어왔을 때의 흥분을 그는 “의외로 등잔 밑이 어두웠다는 사실에 재삼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로 대신했다.
만주를 방랑하던 백석이 1940년 조광사에서 ‘테스’를 번역 출간하기 위해 서울을 다녀갔다는 기록만 있었을 뿐 누구도 실체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테스’의 서강대본 발견은 최 교수의 집요한 탐문 끝에 이뤄진 셈이지만 서강대 입장에서는 아쉬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도서관 소장 도서 전체를 목록화하고 전산화했다면 얼마든지 능동적인 발굴이 가능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번 일은 은사인 최 교수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테스’를 선뜻 복사해준 황 교수의 학자적 양심에 따른 훈훈한 미담 사례이기도 하다.
# 지난 2월 ‘한국현대장편소설사전’을 출간한 송하춘 전 고려대 교수의 경우는 국내 각 대학도서관의 데이터베이스 덕을 톡톡히 본 사례에 속한다. 그는 현대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이광수의 ‘무정’(1917)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의 모든 장편을 수집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10년 전부터 국내외 각 도서관에 소장된 신문과 잡지목록을 샅샅이 훑어야 했다. 작업 초기엔 많은 비용을 들여 해외 출장까지 가야 했지만 3∼4년 전부터 상황은 크게 호전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온라인 시스템이 정착되면서 해외 출장 횟수는 상대적으로 줄었고 특히 국내 각 대학도서관들이 소장 도서목록과 서지사항을 전산화함에 따라 연구실에 앉아서도 목록조사를 어느 정도 해낼 수 있었다.
# 단재 신채호의 ‘대동역사’ 필사본이 역사학자인 김종복, 박준형 박사의 탐색작업 끝에 연세대 학술정보원 국학자료실에서 발견된 것은 지난해 4월이었다. 1907년쯤에 집필됐고 1914년 무렵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동역사’는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던 김윤경 박사가 1973년 이 학교 도서관에 기증한 장서에 포함돼 있었으나 두 학자의 눈에 띄기까지 무려 40년간이나 휴면상태에 있었다. 하마터면 초기 단재 역사학의 구체적인 모습이 영영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이런 인문학적 성과들은 ‘아카이브(archive)’에 대한 국가 차원의 투자가 더욱 강화되어야 함을 우회적으로 말해준다. 그리스어에 뿌리를 둔 ‘아카이브’라는 용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영구보존 자료를 선별하고 수집해 보존하는 장소나 기관을 지칭하며, 다른 하나는 영구보존의 가치를 인정받아 선별된 ‘보존자료’ 자체를 말한다. 아카이브는 한 국가의 문화적 경쟁력을 나타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근래 들어 여러 대학에 기록관리학과나 문헌정보학과가 생겨나고 아키비스트라는 직종이 정착돼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아키비스트는 보존 가치를 지닌 기록에 대한 평가, 수집, 정리, 보존, 검색제공의 책임을 진 사람을 지칭한다. 또한 영구보존할 기록과 폐기할 기록을 선별하기도 한다. 역으로 말하면 모든 기록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생애주기를 갖는다. 예컨대 백석 번역의 ‘테스’는 1940년에 출생했지만 연구자의 손길이 닿는 순간, 무려 73년 만에 휴면상태에서 깨어나 제2의 인생을 맞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 깨우기는 동화 속 이야기만이 아닌 것이다.
각급 도서관의 디지털 아카이브가 정착되는 날, 우리 인문학과 국학은 새로운 중흥기를 맞게 될 전망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정부는 디지털 아카이브 100% 달성을 위해 지속적인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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