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10-22 12:38
[기록이 없는 나라]<8>기록물 관리체계 원년으로 삼아야
세계일보 2004년 6월 8일자

◆특별기획취재팀=채희창, 박병진, 주춘렬, 김형구, 이우승기자(specials@segye.com)


<8-1>기록물 관리체계 원년으로 삼아야

국민엔 알 권리를…후대엔 정확한 역사를

“공무원은 자신들이 수행하는 업무를 기록함으로써 그것을 증거할 책임을 갖는다. 이런 책임은 고위층이 될수록 커진다.”
미국의 국립기록관리청장 대리를 지낸 트루디 피터슨의 말이다. 공공기록이 잘 관리돼야 하는 이유는, 그 당대 정부의 공적 행위에 대한 ‘설명책임(accountability)’을 통해 행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후대에는 시대의 역사를 정확하게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 행정부는 ‘기록하지 않고, 관리하지 않으며, 있는 기록물도 공개하지 않는’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기록이 생산되는 전 과정을 통제해 중요한 기록물을 관리할 수 있도록 한, 혁신적 조치로 평가되는 기록물분류기준표가 올해 초부터 새롭게 시행된 만큼 올해를 ‘진정한 기록관리의 원년’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록문화 선진국’ 진입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기록관리 전문가 양성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 기록관리 전문가 자리부터 만들어야=기록 보존을 책임지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박물관에 학예연구사가 있고 도서관에 사서가 있듯, 기록보존소엔 ‘기록관리 전문가(아키비스트)’가 있어야 한다.

아키비스트의 역할은 학예사와 사서가 하는 일과 다르다. 매일 생산되는 엄청난 분량의 기록물더미에서 영구기록으로 보존할 것을 추려내고, 그 내용을 목록에 요약해 국민이 원할 땐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아키비스트의 업무다. 또한 생산된 기록물의 정보 공개 여부 대해서도 전권을 갖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과 영국은 물론 중국 등 기록관리 선진국은 일찍이 아키비스트를 양성해 이들을 기록관·지방역사기록관 등에 배치함으로써 기록관리 업무의 전문성을 높였다. 하지만 우리는 제대로 된 기록관리 전문가를 배치한 공공기관이 아직 없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아키비스트를 하루빨리 공무원 정식 직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명지대 기록관리학과 김익한 교수는 “조선시대에도 역사의식을 지닌 기록관리 전문가로서 사관(史官)이 존재했다”며 “기록관리 전문가는 국가기록 관리체계를 새롭게 구축하는 중요한 인적 자원인 만큼 대통령 비서실을 비롯해 각급 공공기관에 서둘러 배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기록원 다시 태어나야=기록물관리법상 중앙 기록보존소인 국가기록원이 명실상부한 ‘기록관리 정책기관’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전문성과 독립성이 확보돼야 한다.

지금까지 국가기록원은 범정부 차원의 기록관리 정책에서 배제된 채 ‘영구문서 보존서고’ 정도의 역할만 담당해왔다. 기록물관리법이 2000년 시행되면서부터 ‘원칙적으로’ 국가기록원이 기록관리 총괄부서로 자리매김됐지만, 체계 변화를 뒷받침할 만한 조직과 인적 구성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국가기록원장은 행정직 2급 또는 3급에서 임명할 수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국가기록원이 국가기록 관리정책을 총괄하는 ‘국가기록관리위원회’와 공공기관으로부터 이관된 기록을 처리하는 ‘중앙기록관’으로 그 기능을 분리해 독립기구로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국가기록원의 위상 강화로만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다.

김익한 교수는 “국가기록원이 장·차관급 기구로 격상됐다 해도 문서관리 차원의 기능만 수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국가기록원장의 전문성 확보가 더욱 시급한 과제라는 얘기다.

기록물관리법 시행 직후인 2000년부터 지난해 3월까지 국가기록원장의 평균 재임기간은 10개월에 불과했다. 기록관리 업무의 특성을 파악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기간이다. 참여연대 투명사회팀 전진한 간사는 “국가기록원장의 임기제를 보장하고 개방형 직위제를 통해 외부 기록관리 전문가를 영입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지방기록보존소 설립해야=기록의 불모지인 지방에 지방기록보존소를 세워야 한다. 기록물관리법에 따르면 각 기초자치단체는 의무적으로 자료관을 만들게 돼 있고, 광역자치 단체에는 기록보존소를 설치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의무화된 자료관의 설치율은 20∼30%에 불과하고, 권장사항인 기록보존소는 한 곳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충남대 국사학과 박찬승 교수는 “영국의 경우 지방도시의 ‘아카이브’라 불리는 기록보존소에 1000년이나 지난 기록물이 잘 관리돼 있다”며 “그러나 우리나라 아이들은 자기 고장의 역사에 대해 조사해 오라는 숙제를 받으면 갈 곳이 없다”고 지적했다. 자치단체장들은 흔히 자료관이나 기록보존소가 문서를 단순히 ‘보관’만 하는 곳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방 기록보존소는 자료 보존과 열람 서비스를 맡는 행정기관으로서의 1차적 기능 이외에도, 박물관이나 차원 높은 의미의 ‘기록관’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8-2>김선영 前정부기록보존소장

"보존-폐기 투명관리 청와대부터 실천을"

“기록물 문제만 언급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투명한 관리도 안 되고 책임지는 기구도 없는 실정입니다.”
김선영 전 정부기록보존소장(현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이사·사진)은 7일 “기록물관리법이 국회를 통과할 때 힘 있는 부처의 반대가 많았고, 행정자치부를 비롯한 어느 기관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며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을 회상했다. 그는 1995년 3월부터 2000년 2월까지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 소장을 지내면서 기록물관리법의 입안과 국회 통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기록물관리법의 산증인으로 꼽힌다.

그는 “처음 법을 만들 때보다 취지가 후퇴하고 업무 강제도 많이 약화된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김 이사는 현 정부의 기록물 관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꼬집으며, 무엇보다도 기록 보존 기구와 인력을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이사는 “조선시대 기록을 담당한 춘추관도 인력이 163명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 국가기록원은 136명밖에 안 된다”며 열악한 실태를 설명했다. 그는 이어 “소장 재임 때 기록물을 전담 관리하는 전문요원 자리를 만들자고 주장했지만 아직도 안 만들어진 상태”라면서 정부의 무관심한 기록 관리 행정을 강하게 질책했다.

김 이사는 또 기록물관리법이 그대로 시행되는지 감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김 이사는 마지막으로 폐기심의위원회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는 “200년 역사의 미국이 약 2억권, 프랑스가 6400만권, 중국이 1억5000만권의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지만 5000년 역사의 우리는 고작 80만권에 불과하다”면서 무단 폐기가 빈번하게 자행됐음을 지적했다. 그는 특히 “책임소재를 남겨두기 싫어하는 공무원의 속성상 보존기간을 가급적 짧게 하고 되도록 빨리 폐기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폐기심의회에 아키비스트의 참여가 필수적이며 우선 청와대부터 이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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