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자료 기증하고 싶어도 문의할 곳조차 마땅치 않은 대구
대구 문화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대구 문화의 역사적 자료들. 개인이 소장한 자료는 자칫 유실되기 쉽다. 문화계 관계자들은 더 이상 자료들이 소실되기 전에 아카이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0년 연말, 고 정점식 화백의 서재에서 나온 대량의 책들이 헌책방에 풀렸다.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한 미술인들과 미술연구자들은 헌책방을 뒤지며 중요한 자료들을 구입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 자료가 유실되고 겨우 일부를 구할 수 있었을 뿐이다.
정점식 화백은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대가로, 지역뿐만 아니라 한국 미술사에서도 의미 있는 화가다. 한 미술인은 “정 화백은 성격이 꼼꼼해, 오랫동안 자료를 모아두었다”면서 “트럭 두 대 분량의 자료들이 버려질 때까지 대구시와 관계자들은 아무도 그 자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게 화가 날 지경”이라고 말했다.
대구 근현대 문화 자료들이 축적되지 않고 사장되고 있다.
대구시는 용역을 발주해 지난해 9천여 건의 기록물을 수집했다. 기록물을 수집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심의조차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대구시 관계자는 “9천 점 가운데 1천여 점은 디지털화했다”고 밝혔다. 원본을 아카이브할 것인지 여부는 이후에 판단할 계획이며, 아카이브를 민간위탁할지, 대구시가 직영할지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대구시는 아카이브 사업 최종 목표가 ‘디지털’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문화계 관계자들은 “디지털화도 좋지만 그에 앞서 원본을 확보하고 보관할 공간을 찾고, 운영주체부터 확보해야 한다. 디지털화는 그다음의 문제가 아닌가” 하고 되묻고 있다.
◆ 대구, 아카이브 사업의 목표는?
대구시는 대구예술발전소 미디어테크를 만들어 3층에 문화예술 아카이브를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도서관 기능과 정보센터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 대구시 관계자는 “자료를 디지털화해서 필요한 사람들이 찾을 수 있게 하고, 그럼으로써 예술가로서 자부심을 심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개인에게 자부심을 안겨주기 위한 사업은 개인 비석을 세워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모적인 행정이라는 게 문화계의 중론이다.
아카이브는 무엇보다 정확한 목표가 중요하다. 오래된 자료를 그저 그러모으는 것이 아니라, 목적에 맞는 자료를 선별해서 골라야 하는 것.
한 미술 연구자는 황당한 제의를 받았다. ‘당신이 가진 자료를 아카이브에 기증해라’면서 자료 목록을 요구한 것. 그 연구자는 “내가 가진 자료는 평생에 걸쳐 발품을 팔아가며 모은 것일 뿐 아니라 연구를 하기 위해 수시로 봐야 하는 것들”이라면서 “내게 어떤 자료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자료를 기증하라는 것 자체가 아카이브 목표가 없는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은퇴를 앞둔 대학 교수, 예술가의 유족 등 개인이 자료를 소장하기 버거운 이들이 자료를 기증하고 싶어도 마땅히 문의를 할 곳조차 마땅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한 미술관계자는 “자료의 가치를 아는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먼저 자료 기증을 부탁해 귀중한 많은 자료들이 다른 지역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엔 대구시민회관 리모델링 과정에서 시민회관에 쌓여 있던 각종 기록물들의 소재를 파악하지도 못하고 있다가 건설사 측이 보관하고 있는 것을 되찾아오기도 했다. 아직도 대구시는 기록물에 대한 중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시간이 이대로 지나가 버리면 디지털화고, 뭐고 할 수 있는 자료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이처럼 ‘대구의 아카이브 현 주소는 주체도, 목표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화 관계자들의 말이다.
◆근대문화의 보고, 대구
대구 문화인들은 스스로 대구가 ‘구상미술 도시’ ‘음악의 도시’ ‘근대 사진의 도시’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증명할 체계적인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대구경북연구원 오동욱 팀장이 연구한 ‘대구문화창조발전소 미디어테크 아카이브 구축에 대한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문화예술자료의 기록은 문화예술의 역사뿐만 아니라 당시 문화를 보여주는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단순히 문화콘텐츠라고 표현하기에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기록이므로 체계적 보관과 관리가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대구의 각 문화기반 시설에서조차 기록의 상당 부분은 방치되고 있다는 것.
연구자들도 자료의 부족을 호소한다. “논문을 쓸 때마다 자료를 구하는 게 가장 어렵다”는 것이 근대미술 연구자들의 공통된 고충이다. 그래서 풍부한 연구 논문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근대 문화에 대한 풍부한 연구가 나와야 현대 문화의 맥을 이어갈 수 있는 현실을 볼 때 ‘문화의 도시’를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하다.
앞서 언급한 보고서에는 문화예술 아카이브는 문화 콘텐츠로 재생산될 가능성이 높고, 그 자체로 스토리텔링 자원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각 분야별로 문화인들은 축적된 자료가 없다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대구사진문화연구소 김태욱 소장은 “대기업이 사진연구소를 세우는 등 사진 콘텐츠에 대한 중요성이 나날이 커지고 있지만, 대구는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많은 자료들이 사장되거나 외지로 팔려나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원로 음악인 우종억 전 대구시향 상임지휘자는 1940년대부터 꼼꼼하게 본인의 음악 활동에 관한 모든 자료를 모아두었다. 그는 “음악가에 대해 연구하려면 작품 몇 개 외에 다양한 연구자료가 필요한데 지금은 자료가 없다”고 말했다. 지금 있는 자료라도 서둘러 모으지 않는다면 다 흩어지고 사라질 거라는 게 그의 우려다. 그는 10년 전부터 “후대 연구자들을 위해서라도 아카이브를 제대로 공간에 체계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꾸준하게 주장하고 있다.
◆ 신뢰할 수 있는 주체 필요
자료를 수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다. 주체가 꾸준히 찾아가고 공을 들여 아카이브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귀한 자료를 지속성 여부를 알 수 없는 기관에 기증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현재 대구가 아카이브를 위해 자료를 수집했지만 이 사업이 계속 진행되지 않을 경우 신뢰를 잃어버리게 된다.
오동욱 팀장은 “여러 원로 예술가와 유족들을 만나봤지만 인내를 갖고 중장기적으로 꾸준히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일단 아카이브에 대한 시스템을 갖추고, 이에 대한 믿음을 줄 때 자료 수집이 쉬워진다는 것. 대구시를 믿고 자료를 내줬는데 사업 진행이 안 되면 자칫 자료 기증자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
미술평론가 권원순 씨는 “어쩌면 대구에서 가장 시급한 일이 아카이브일지 모른다”면서 중요성을 강조했다. 권 씨는 “대구는 굉장히 풍부한 자료가 많은 만큼 문학`음악`미술 아카이브를 한곳에 모아 아카이브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보배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묻어두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예술단체들도 아카이브에 대해 아쉬움을 보였다. 대구예총 문무학 회장은 “원론적이지만 아카이브는 반드시 구축해야 한다”면서 “무조건 지나간 자료라고 의미 있는 것은 아닌 만큼 어떤 자료를 모을 것인지 기준을 명확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매일신문 2012.11.14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0858&yy=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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