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1-24 10:10
'문화궁전' 국립중앙도서관서 司書로 일해보니 논문실 한산... 족보·전화번호부 열람신청 쇄도
자료실별 이용자 제각각
6층 고전실은 노인들 많고… 4층 자연과학실에는 20~30대 젊은층으로 북적

막무가내 이용자들로 곤혹
조상 땅 찾고싶다 묻곤 왜 자료 없느냐며 화내고
방학땐 과제 스스로 않고 사서들 이용하는 학생들도

고서 27만점등 880만권 소장
매일 신간 1500권 들어와 1권 분류하는데 1시간 걸려
전문사서는 하루 50권 처리 "책 읽을 시간이 없어요"

"쉿! 지금부터는 발소리도 조심해야 됩니다. 이용자들이 생각보다 예민하거든요."

서울 서초구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 본관 4층 자료실 문을 열기 직전, 김경주 사서가 낮은 목소리로 단단하게 일렀다. 책으로 빼곡히 둘러싸인 열람석에선 10여명이 책 읽기에 몰두해 있었다. 70대의 이모씨는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준비하기에 앞서 시중에 절판된 "떨어지는 공부, 합격하는 비결'이라는 책을 봤고, 대학 강사인 김모(54)씨는 수업이 없는 날마다 중국 역사책을 본다고 했다. 검찰청 직원인 정모(49)씨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한 달 만에 사마천의 사기를 완독했다"고 했다. '지식백화점' '문화궁전'이라는 별칭을 가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16·18·19일 사흘간 사서 체험을 했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지하는 서고로 꽉 찬 ‘책의 바다’다. 대출 신청이 들어온 서고의 책은 ‘북카’라고 불리는 자동 이송 시스템(사진 앞쪽 가운데)에 실려 지상으로 올라간다. 본지 곽래건 기자가 본관 지하 5서고에서 책이 가득 실린 ‘북트럭’을 밀고 가고 있다. / 이진한 기자
◇노인 많고 족보·전화번호부 인기

첫날 본관 1층 서고자료 신청대에 앉자마자 대출 신청이 쏟아졌다. 대출과 반납 업무를 하는 동안 북한인명사전, 판타지 장편소설, 불경 등 온갖 종류의 책이 들어오고 나갔다.

자료실에 따라 이용자가 조금씩 달랐다. 6층 고전운영실 이용자는 대부분 노인이었다. 가장 인기 있는 책은 의외로 족보(族譜). 절반이 족보를 탐독하고 있었다. 봉성기 고전운영실장은 "일제강점기나 그 이전의 족보를 보러 오는 이가 많다"고 했다. 영화와 음악 자료가 있는 미디어자료실에도 노인이 많았다. 사극을 보는 할머니, 10년 전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반면 4층 자연과학실에는 20~30대 젊은층이 많았다.

정부간행물실의 전화번호부는 표지가 닳을 정도로 '베스트셀러' 대접을 받았다. 다른 책들은 도서관에 온 지 3~4년이 지나면 지상의 개가실(開架室)에서 지하서고로 밀려나지만 전화번호부는 예외였다. 일요일인 18일 오전 돋보기를 들고 1964년도 전화번호부를 보던 박모(64)씨는 "예전 전화번호부에는 집 주소까지 나와있다"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락이 끊긴 집안 사람을 찾고 있다"고 했다.

학위논문실은 한산한 편이었다. 학위논문실은 15년 전만 해도 워낙 이용자가 많아 사서들에게 근무 기피처 1순위였다. 팔의 인대가 늘어난 사서가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권지영 사서는 그러나 "학위논문을 제출할 때도 컴퓨터파일만 제출하는 경우가 많고 인터넷을 통해 논문을 보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용자가 계속 줄고 있는 자료실"이라고 했다. 1999년에는 서울 역삼동 분관 전체를 사용했던 학위논문실은 2005년 본관으로 축소 이전됐고, 내년엔 없어질 운명이다.

◇애매한 질문 던지는 이용자도

국립중앙도서관은 고서 27만점을 포함해 장서 880만권을 소장한 국내 최대 규모의 도서관이다. 이 수많은 책과 자료를 일반인이 찾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사서들이 앉아있는 1층 안내데스크엔 자료 열람 문의가 하루 110여건씩 쏟아졌다.

기자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안 돼 60대 남성이 "한지의 유래를 알고 싶다"며 동국여지승람을 어떻게 볼 수 있는지 물어왔다. 또 다른 남성은 "올해 증권회사에 상장돼 있는 회사 목록을 보고 싶다"고 했다. 신은식 사서는 "무엇을 찾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라며 "'조상의 땅을 찾고 싶다'는 등 막연한 질문을 한 뒤 '왜 중앙도서관에 모든 자료가 없느냐'며 화내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하지만 이용자가 무엇을 찾든지 이를 도와주는 게 정보중개자인 사서의 임무다. 단적인 예가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의 '사서에게 물어보세요' 코너다. 어떤 질문도 공란을 둬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러나 하루에 2~5개쯤 올라오는 질문 중엔 '피카소 그림이 왜 명화가 됐나' '우산의 구조와 기능, 제조법' 등 답변이 까다롭거나 어려운 문항이 적지 않아 사서들이 애를 먹는다고 한다. 도서관 관계자는 "학교 제출 과제를 스스로 하지 않고 사서를 이용하는 학부모나 학생들이 있다"면서 "방학 기간보다 학기 중에 질문 숫자가 더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중앙도서관에는 180여명의 사서가 있지만 이용자들과 직접 대면하는 사서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매일 외부에서 들어오는 1500여권의 책과 각종 멀티미디어 자료를 분류하고 서지(書誌) 정보를 입력하는 것도 사서의 몫이다. 이 정보는 전국 다른 도서관이 그대로 가져가 '대한민국 표준'이 된다. 직접 해보니 책 한 권의 기본 정보와 목차를 입력하고 한국십진분류법(KDC)에 따라 분류 번호를 매기는 데만 1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사서들은 보통 하루 50여권의 책을 처리한다고 한다.

'책의 바다'라고 불리는 지하서고에도 사서가 많았다. 서고자료신청대에서 대출 신청이 들어온 책들을 찾기 위해 사서와 사서보조원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책 자동 이송 시스템이 설치돼 있지 않은 서고 사이를 오갈 때는 이용자에게 책이 전달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전동스쿠터까지 타야만 했다. 자료수집과 이은정 사서는 "온종일 책을 만지지만 사서가 되기 전보다 책을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 조선일보 2012.11.2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23/20121123013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