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화수장 연구’ 출간
문화선진국 중국 서화 수집 주력
궁중에만 50곳 이상에 따로 보관
헌종은 승화루에 명품 천점 갖춰
이른바 ‘컬렉터’라고 일컫는 예술품수장가들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기원전 이전 한나라,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등장할 정도다. 주술 제의를 뛰어넘어 명품 수집과 감상이 유력자들만의 고급한 문화 행위로 인식됐던 까닭이다. 이 땅에서도 통일신라 이래 고려·조선시대 왕실·사대부·귀족들은 활발한 수집·수장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서양·중국만큼 그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숱한 전란 등으로 수집품들이 대부분 사라졌고, 관련 기록들도 뿔뿔이 흩어진 제약이 크다.
미술사연구자인 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가 최근 펴낸 대작 <조선시대 서화수장 연구>(신구문화사)는 조선시대 서화 수장의 역사와 그 문화사적 의미를 처음 집대성한 저술이다. 박사논문이 바탕이 된 이 책은 조선시대 왕실 종친과 사대부들이 주도한 서화 컬렉션 흐름을 시대별로 통괄하고 주요 소장품과 수장 기록 등을 분석해 당대 시각문화와 수장 활동의 관계를 분석한다.
“흔히 컬렉션을 사고파는 경제적 수익과 그들만의 개인적 취향에 급급해 모은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데요, 옛 조선 수장가들은 그렇지 않았어요. 수집목록들을 보면, 당대 중국의 문화 흐름에 민감했고, 관련된 문헌들도 반드시 함께 모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황씨는 유교국가였던 조선왕조는 선초부터 중국 고금의 서화 수집에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한다. 국가의 위엄을 드러내는 상징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문화선진국인 중국 글씨와 그림, 금석문들만큼 좋은 본보기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궁중에만 50곳 이상에 서화를 보관했다. 흥미로운 건 왕실 종친 컬렉션이 17세기 숙종대를 기점으로 하여 19세기까지 제각기 색다른 특색을 띠며 전개됐다는 점이다. 특히 예술 애호가였던 숙종은 역대 선왕들의 서화를 보관하는 전각을 별도로 만들었고, 중국·일본 서화들을 곳곳의 전각들에 보관하며 목록화하는 전통을 만들어냈다. 아울러 동시기 선조 후손인 낭선군 이우 등 종친들이 서화를 개별적으로 수장·감상하는 유행을 크게 일으키면서 18세기 서화 컬렉션이 융성하는 토대를 쌓았다고 한다.
황씨는 “감상에 집착하면 천박해진다는 유교적 관념 탓에 18세기 영·정조대까지 군주들은 개인적 취향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19세기 초 들어 양상이 크게 바뀐다”고 지적한다. 청의 고증학과 선진 문물에 바탕한 추사 김정희의 신예술론이 대유행하면서 헌종·고종 등은 개인적인 컬렉션 취향을 분명히 드러냈다는 것이다. 실제로 헌종은 낙선재 승화루에 명청대 회화와 전각, 글씨 등 1000점 가까운 명품들을 갖추고, 직접 감정까지 했고, 고종은 경복궁 집옥재에 서양·일본 그림을 상당수 포함한 컬렉션을 꾸리기도 했다.
사대부층과 중인층 재력가들도 18세기 후반 이래 앞다퉈 전각을 세워 개인박물관들을 차렸고, 가짜 명품이 사회문제가 될 정도로 컬렉션에 대한 관심은 폭증했다고 책은 전한다. 중국 명품에 혈안이 된 서울 컬렉터와 퇴계 등 선현들의 유물 수집 보존에 목맸던 지방 컬렉터들의 차이, 역관 김이주 등 낯선 수장가들의 발굴 등 조선 후기 컬렉션 역사의 생생한 단면들도 엿보인다. 황씨는 “조선 후기 주요 컬렉션들은 구한말 이후 실물이 대부분 사라졌다”며 “유출 경위와 함께 17~19세기 주요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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