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2-02 10:29
[만물상] 헌책방 거리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헌책방을 찾는다. 집 근처인 서울 신촌 일대에는 아직도 '글벗서점' '공씨책방' '숨어있는책' 같은 정겨운 이름의 헌책방이 많이 남아 있다. 지난주 점심시간엔 종로 2가에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 같은 헌책이라도 '손님이 방금 팔고 간 책' '오늘 들어온 책' 식으로 따끈따끈한 정도를 분류해 놓은 게 센스 있어 보였다. 원로 영문학자 이상옥 서울대 명예교수가 20년 전에 낸 에세이집 '두견이와 소쩍새' 등 4권을 1만3000원에 샀다.

▶1960~70년대 '거리의 철학자'로 불렸던 민병산은 동대문 헌책방 거리를 하루도 빠짐없이 찾았다. 그는 "사고 싶은 책이 있는데 돈이 모자라 책방을 그냥 나올 땐 가슴이 쓰리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더 큰 아픔을 느낄 때가 있었다. "임자의 손에서 떠날 리 없는 책이 헌책방에 와서 다른 책들 사이에 끼여 있을 때"이다. 그는 "이 책이 어떻게 해서 주인과 헤어졌을까, 주인에겐 무슨 사연이 있었을까, 상상은 구구하고 슬프다"고 했다.


▶해마다 4만 종 넘는 새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중 대부분이 독자에게 기억될 틈도 없이 서점에서 사라진다. 신간 서점에서는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던 책들이 헌책방에선 "나 여기 있소"라고 존재를 드러낼 때 독자는 보물을 발견한 듯한 기쁨을 느낀다. 헌책방 순례 50년인 언론인 남재희는 이를 "아스팔트 위의 낚시꾼이 월척을 하는 희열"이라고 했다.

▶독서 선진국에는 그 나라를 대표하는 헌책방 거리가 있다. 일본 도쿄 간다(神田)의 진보초, 영국 런던의 채링 크로스 거리, 파리의 센강변 벼룩시장 같은 곳이다. 영국 웨일스의 헤이온와이는 50년 전 쇠락한 탄광촌을 헌책방 거리로 탈바꿈시켜 연간 50만명을 불러 모으고 있다. 지난 10년 일본의 신간 서점은 6000여곳이나 줄었지만 진보초의 헌책방들은 오히려 늘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그제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청계천이나 신촌 대학가에 헤이온와이나 진보초 같은 헌책방 거리를 만들겠다"고 했다. 우리에게도 과거 서울 청계천, 부산 보수동, 대구 남문시장, 인천 창영동 등 주요 도시마다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던 헌책방 거리가 있었다. 물자가 부족해 재활용한다는 뜻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론 책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그 시절엔 있었다. 요즘 번창하는 커피 산업과 헌책방 문화를 접목하면 서울에 격조 있는 거리가 탄생할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조선일보 2013.02.02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2/01/20130201022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