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4-05 16:47
“시내서 만나자” 하면 한번에 알아듣던 그 곳 ‘종로서적 앞’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40501033130025005 [619]

모임에 조금 늦었다. 홰홰 체머리 인사를 날리며 서둘러 들어가는데 좌중에 한 중년 초입의 여성이 뜬금없는 여고생 갈래머리를 하고 있다. 옷차림까지 파스텔색 원피스였다. “예진이가 납셨구나!” 지각으로 뻘쭘해진 자가 이 정도 가벼운 농담을 날리면 예의상이라도 예서제서 킥킥 웃는 반응이 나와야 정상인데 어, 썰렁하다. 둘러보니 대부분 20∼30대 친구들이다. (방송국 작가들과의 회의였다). 곧장 깨달음이 왔다. 이들에게 예진이는 ‘손예진’이었던 거다.

추억의 영화 ‘진짜진짜 좋아해’를 상기할 연배가 아니었다. 양 갈래머리 땋아 내린 소녀풍 여인을 보며 내가 대뜸 떠올린 예진이는 물론 덕화(이덕화)의 여자친구 ‘임예진’을 뜻한다.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니들은 비누냄새 퐁퐁 풍기는 여고생 하얀 교복 상의의 청순을 모르겠구나….’

실제의 임예진은 애들이 혓바닥이라 부르던 빨간 넥타이 차림의 왕십리 무학여고를 다녔다지만 일단 3대 발광, 5대 극성 가운데 한 학교를 다니는 걸로 상정하자. 그게 뭐냐고? 에, 또… 1970년대 장안에서 껌 좀 씹는다는 소녀들이 다니는 여학교로 명성이 자자했던 은광, 신광, 염광여고를 일컬어 3대 발광이요, 덕성, 계성, 명성, 보성, 한성여고를 일러 5대 극성이라 하였으니 진짜진짜 멋쟁이는 그 학교들에 다 모여 있었더라, 얼쑤!

말이 나온 김에 그 시절 예진이의 하교시간을 따라가 보자. 일단 시내로 나가면 첫 번째 코스는 진양 혹은 화신 등의 ‘분식센타’에서 매운 비냉(비빔냉면) 따위를 먹는다. ‘분식센타’에는 반드시 디제이가 있고 돈 매클린의 ‘아메리칸 파이’ 같은 신곡을 줄곧 틀어준다.

‘분식센타’를 나와 종로 2가 태극당이나 고려당 빵집에서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다가 ‘어마 깜짝이야!’ 늦었다며 서둘러 뛰어가는 곳은 송성문의 정통종합영어(나중에 성문종합영어)나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을 교재로 쓰는 단과반 학원이다. 야간자율학습이 없던 그 시절 대부분의 고교생들은 종로통에 즐비한 단과반 학원을 필수코스인 양 다녔다.

그런데 예진이는 발광이거나 극성인 여고생이다. 학원에서 공부만 했겠는가. 덕화도 만나야지! 장담한다. 그 시절 수많은 예진이와 덕화들이 만남을 정했던 장소는 거의 한 군데였다. 그곳은 바로 종로의, 아니 서울의 랜드마크이면서 만남의 광장이자 청춘 페스티벌의 현장인 종로서적 앞이었다.

서점 앞에 너른 광장이 있는 것도 특별히 인상적인 표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길거리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도 무슨 까닭인지 사람들은 만날 약속을 정하면 바글바글 종로서적 앞으로 모여들었다. 시내에서 만나자 하면 종로 2가 보신각 옆 종로서적 앞에서 보자는 말과 동의어였다. ‘종로서적 앞’을 정확히 말하면 서점이 들어선 건물 1층 로비를 뜻하는데 엄청 비좁았다. 그 손바닥만 한 공간에 너도나도 약속을 정하니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격조했던 동창생과 우연히 해후하는 일 못지않게 바로 몇 사람 건너 새초롬히 딴청을 부리는 전(前) 여친의 뒤통수를 목격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난 2002년,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종로서적의 최후가 안타까워 신문에 기고했던 내 글을 다시 읽어본다.

<SINCE 1907년. 반만년 역사 어쩌고 하는 나라에 이쯤 되는 내력을 지닌 곳이 드물다. 3·1운동, 6·25전쟁, 4·19혁명이 모두 그 앞을 스쳐갔다는 말이다. 한용운이 온종일 서서 책을 읽고, 모자로 얼굴을 감춘 박헌영이 암호를 주고받으며 동지를 만나고, 대낮부터 술에 취한 김수영이 소란을 피웠는지도 모를 장소다…. 그토록 오랜 세월 종로서적은 존재했지만 나의 혹은 우리들의 종로서적은 다분히 1970년대를 의미한다. 아니, 차라리 70년대가 종로서적스럽다고나 할까.>

1907년에 설립된 종로서적과 역사를 결합시켜 떠올리는 시대가 1970년대인 것을 이해해 달라. 나는야 58년 개띠. 그 유명한 베이비붐 세대가 유신이 뭔지, 군부독재가 뭔지도 모른 채 마냥 뛰놀던 고교시절 한가운데가 바로 70년대였다. 사회문화사적으로 볼 때 한국의 70년대는 중세왕국의 잔영을 완전히 떨치고 실질적인 현대국가로 넘어가는 간이역 같은 시기였다. 대형화, 물신화, 제도화가 이때 급격히 이루어졌다. 신인 소설가 최인호가 ‘청년문화론’을 제창하고 하길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이 나왔다. 인지와 문화가 대폭발을 일으키던 시대였다. 넘쳐나는 에너지로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현대(Modern)의 당시 최첨단 인터페이스는 책이었다.

스마트폰 세대들은 의아할 것이다. 어떻게 책이라는 느린 매체가 최첨단일 수 있는지. 하지만 실제로 그랬다. 냉전적 사고의 대전환을 요구했던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1974년에 출간됐고, 대니얼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 번역서가 삼성문화문고를 통해 국내에 처음 출시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종로서적의 책들은 층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내가 즐겨 찾은 서고는 시집과 문고본 코너였는데 모두 6층으로 기억나는 그곳에서 몇 층이었는지가 가물가물하다.

어쨌거나 최초의 출판사 기획물 시집 시리즈로 나왔던 민음사 ‘오늘의 시인총서’를 500원씩에 한권 한권 구하던 기억이 새롭다. 정현종의 ‘고통의 축제’, 이성부의 ‘우리들의 양식’, 고은의 ‘부활’, 강은교의 ‘풀잎’ 등을 읽으며 얼마나 황홀하던지.

하지만 소년의 열정을 휩쓸어간 것은 단연 한도 끝도 없이 다양한 문고본들이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서문문고, 문예문고, 삼성문고, 열화당 미술문고, 신구문고, 동서문고…. 그중에서도 압권은 1975년부터 나오기 시작한 삼중당 문고였다. 그 싸고 두껍고 작은 책의 깨알 같은 글씨를 어떻게 읽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것이 책을 사면 반드시 점원들이 커버를 벗기고 서점 고유의 문양이 새겨진 포장지로 다시 싸줬다. 그 번거로운 재포장을 몇 초 만에 해치우는 여점원들의 솜씨는 가히 예술의 경지였다. 종로서적은 단원 김홍도의 서당 풍속화였는데 인근 양우당, 동화서적, 삼일서적들도 각각 고유의 아취를 담은 포장지를 자랑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70년대 젊은이들은 누구나 손에 책 몇 권씩을 꼭 들고 다녔던 것 같다. (멋지지 않은가?)

종로서적에 소소하지만 미소가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다. 세 살 아래 여동생이 지금도 깔깔 웃으며 떠올리는 추억이다. 당시 혜화여고에 들어간 동생이 새로 만나 친해진 반 아이에게 우연히 물었단다. “너네 집 뭐하니?” “응, 우리집 책방한다.” 두어 군데 유리가 깨진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 참고서 따위를 사는 동네 책방을 떠올린 동생이 그 반 친구의 정체를 안 것은 1년이 다 되어서였단다. 그 책방집 딸의 부모가 운영하던 서점이 바로 종로서적이었다. 종로서적네 가정교육이 특별한 것만도 아니었다. 그 시절에는 잘 살고 못 사는 것의 격차가 매우 좁았고 누구도 그런 걸 드러내지 않았다.

같이 문예반을 하던 내 친구네 집이 대단한 부유층이었다는 것도, 교내 행사 때문에 음향 기자재를 빌려 쓰고 라면을 사줬던 퉁퉁한 1년 후배가 현재 CJ그룹 회장 이재현이라는 것도 당시엔 너무나 심상한 일이었다. 아무도 그런 계층성에 관심을 갖지 않던 시절이었다. ‘니들이 보릿고개를 아냐’ 투로 젊은이들을 책망하는 고루한 노인네들과 다를 바 없는 회고이겠으나 그래도 그런 우리들의 지나간 방글라데시가 적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종로서적이 기울어갈 무렵 광화문 교보문고가 등장해 여태껏 고군분투하고 있다. 아마도 대기업의 잔가지라는 배경이 없었다면 그나마 버티기 힘들지 않았을까. 신간의 잉크냄새를 맡으며 책을 고르고 연인과 친구를 만나던 일은 과거의 풍습이 되고 말았다. 거리의 책방 대신 컴퓨터로 온라인 서점을 클릭하다가 이제는 아예 책 사는 사람 자체가 귀하게 변해 간다. 청춘들은 책방 대신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만나고 스마트폰으로 지식을 쌓는다. 대세이고 흐름인 걸 뭐 어쩌겠는가만 그래도 생각해 볼 점은 있다.

책과 책방이 중심에 서 있던 시절과 지금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가치에 대한 관점의 이동이다. 내면의 가치가 존중받던 책방의 시대와 성형수술을 통해서라도 외모를 가꾸어야만 하는 멀티플렉스 시대는 질적으로 다른 시대다. 너도나도 갸름한 얼굴과 다져진 복근을 동경하지만 그래도 나는 내면세계의, 아니 종로서적의, 아니아니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소녀 임예진의 시대를 향하련다. 그러고 보니 종로 2가에 가본 게 언제던가.

30년대에 엘리베이터 갖춰… ‘지식산업 상징’여겨지다 2002년 부도
화창한 봄이 오고 있지만 서점들은 겨울시대다. 화려한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뜨겁던 그해 문화인들의 지적 갈증을 씻어주던 종로서적은 역사의 뒤뜰로 사라졌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던 종로서적이 어음 2800만 원을 갚지 못해 2002년 6월 4일 최종부도 처리됐다. 종로서적이 있던 곳은 고시학원으로 바뀌었다. ‘국내 대형서점의 효시’이자 지식산업의 상징이었던 종로서적 폐점은 한국 문화의 부피가 그만큼 얇다는 것을, 문화 아이콘이 현실의 싸늘함을 결코 커버하지 못한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다. 부도 당시 서점 규모는 1500평에 달했다. 1960년대, 1970년대에는 직원들에 대한 대우도 좋아 고졸 여직원 입사 경쟁률이 100대 1에 달했다고 한다.

종로서적은 일반기업이 아닌 순수 소형서점에서 출발해 대형서점으로 발돋움했다는 점에서 지금의 교보문고 등과는 다르다. 종로서적의 역사는 1890년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 집에 세운 ‘예수교서회’가 1907년 기독교 서점을 열면서 시작됐다. 종로서적의 뿌리인 이곳은 1911년 설립 당시의 목조기와집을 헐고 2층 양옥 신건축물을 세웠다. 1930년대에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엘리베이터(1대)가 있는 건물로 장족의 발전을 이룩했다. 서울의 중심이었던 이 서점 뒷골목은 레코드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카페, 바, 선술집, 오뎅집, 마작집, 수선집, 음식점 등이 화려하게 불을 밝혔다고 한다. 당시 상호를 교문서관으로 바꾼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4층, 연건평 600평에 이르는 위용을 드러냈다.

1940년대 일제의 압력으로 잠시 폐관했다가 1948년 교문서관을 종로서관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서울의 한복판인 종로서관에 책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곳은 기독교서적은 물론 종합서적을 취급하는 서점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6·25전쟁 때 이 건물은 불에 탔고, 1953년 지상 1층을 증축하고 재수리를 했다.

1963년 종로서관은 ‘종로서적센터’로 변경됐고 서점 현대화를 선도했다. 1969년에는 종로의 도로 확장 계획에 따라 건물을 개축하고 외국서적부를 신설했다. 1977년에는 종로서적 주식회사가 세워졌고 6층까지 매장이 넓어졌다. 종로서적은 1층부터 매장이 시작되지 않고 2층부터 시작됐다. 계단을 올라갈수록 신천지가 펼쳐졌다. 한 층에 또다시 복층으로 허리 높이 정도를 더 올라가면 새로운 서가가 독서 마니아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2층에 기독교관이 시작됐는데 이곳은 종로서적 내에서 매출은 매우 낮았다. 종로서적은 서서 누구나 모든 책을 자유롭게 꺼내서 읽을 수 있는 ‘독서인의 해방구’였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종로서적은 종로를 가로지르는 중심에 위치한 때문인지 약속장소의 대명사가 됐다. 약속을 정할 때는 종로서적 앞이나 몇 층 무슨 코너 등 기호를 주고 받았다. 휴대전화도 삐삐도 없던 시절이어서 약속을 하는 남녀 인파가 서적 앞을 가득 메웠다. 연말에는 사람 사이를 밀치면서 걸어가야 했다. 김홍도의 서당 풍속화가 담긴 종로서적 포장지도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한 중소기업 간부(54)는 “커다란 전과의 가운데 부분 책 사이즈만큼을 오려낸 뒤 종로서적에서 몰래 삼중당 문고 등을 집어넣고 나오는 등 몇차례 책을 훔쳤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지만 종로서적 부도 이후 많이 뉘우쳤다”고 전과를 고백했다.

- 문화일보 2013.04.05
(글. 시인/문화평론가 김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