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열화당에 유품실 개관
출판평론·문화기획에 바친 생애
북디자인 등 시대의 명저 수두룩
경기도 파주출판단지 열화당 2층에 마련된 ‘이중한의 방’. 한국 출판문화계의 선구자인 이중한 선생이 남긴 책 5만 권 가운데 2만 여권을 추렸다. 우리 활자 문화의 맥을 잇는다는 뜻에서다. 왼쪽부터 북디자이너 정병규씨, 이 선생의 맏딸 이주희씨, 부인 최보경씨, 이기웅 열화당 대표.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중한
책으로 만든 무덤 같은 고즈넉한 방에서 그의 영정이 웃고 있다. 사방 벽을 꽉 채운 서가가 호위병처럼 둘러섰다. 공간이 모자라 방 가운데 전탑(塼塔)처럼 쌓인 책은 껴묻거리(부장품)인양 고인의 동무 노릇을 한다. 오래된 책이 풍기는 빛과 냄새가 콘크리트 사무실을 성소(聖所)로 만든다.
26일 오전, 경기도 파주출판도시 열화당(대표 이기웅) 사옥 2층 이 방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출판평론가이자 문화기획자였던 고(故) 이중한(1938~2011)을 기리는 유품실을 여는 잔치는 조촐하면서도 진중했다. 한 시대를 책으로 짓고 가꾸었던 이중한 선생의 넋이 제대로 된 염을 하는 자리였다.
“평생 책과 사랑하고 책과 노닐었던 분을 어떻게 모실까 하다가 책으로 염습(殮襲) 하자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염꾼이 되어 책으로 이중한 선생의 몸을 깨끗이 씻기고 책으로 옷을 입히고 책으로 묶는 일을 하자 했어요. 여기가 이 선생의 영혼도서관입니다. 그가 남긴 5만 여권의 책과 자필 원고를 쓸고 닦아 그 진수를 정리해 모시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염습 아니겠습니까.”
인사말을 하던 이기웅 대표는 목이 메었다. 부인 최보경(76) 여사, 맏딸 이주희(48)씨가 책을 쓰다듬었다. ‘이중한의 방’ 만들기에 힘을 보탰던 북디자이너 정병규(67)씨는 고인이 원고지 앞·뒷면에 정갈하게 써내려간 메모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이중한 선생이 여기 계시구나” 했다.
“고인은 출판이 한 나라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기본이라 여겼던 분입니다. 사실상 한국 최초의 출판평론가이자 문화기획자였죠. 읽고 쓰는 행위를 바탕으로 세상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을 강조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안테나였죠.”
정씨는 “모두들 문화계에 문제가 생기거나 답답한 일이 터지면 이 선생을 찾아갔고, 이 선생은 표준화된 답을 제시했다”고 돌아봤다. 출판대학, 출판도시를 만들 때 큰 틀을 잡아준 것도 선생이었다는 것이다.
자칫 사라질 뻔한 선친의 장서와 재회한 이주희씨는 “매주 토요일이면 아버지가 내게 가방을 들고 나오라고 해 서점을 돌며 한 트렁크 분량의 책을 사서 집으로 들려 보냈다”고 회고했다.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남편을 내조한 최보경 여사는 “가난했지만 정신적 수입은 풍족했다”고 덧붙였다.
‘이중한의 방’ 조성에 참여했던 조윤형 열화당 편집장은 “종수로는 1만5000종이지만 서지학적으로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고, 개인 원고와 메모가 많아 이를 연구하면 20세기 후반 한국 문화의 한 지형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고인은 1960년대 기념비적 잡지인 ‘AVANT GARDE(아방가르드)’나 ‘EROS(에로스)’를 챙겼고 북디자인을 포함해 시대의 명저를 수집했다는 점에서 한국 청년문화의 전위를 이루며 세상 돌아가는 길을 분석하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맥이 끊어질 뻔 했던 우리 출판문화의 또 다른 전승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기웅 대표는 “‘이중한의 방’은 열려있다. 고인의 손때 묻은 책은 그의 유서다. 그의 유지를 잘 읽어 새 길을 낼 후학들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이중한(李重漢)= 1960~70년대 척박했던 한국 출판계에 든든한 주춧돌을 놓은 편집자로 평가받는다. 60년대 월간 ‘자유공론’ ‘세대’ 편집장을 거쳐 70년대 ‘독서신문’ ‘서울평론’ 편집장으로 일하며 한국 출판과 잡지의 지평을 넓혔다. 서울신문 문화부장·논설위원을 지냈다.
- 중앙일보 2013.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