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학 치악산 명주사 고판화박물관장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산사(山寺) 주변 도로가 눈으로 막히는 일이 생긴다. 그런 날에는 버스를 타기 위해 면 소재지까지 미끄러져 넘어지며 7㎞를 걸어간다. 서울에 도착하면 아침에 가장 먼저 문을 여는 장안평에서 시작, 청계천이며 인사동으로 돌아다닌다. 떠나올 땐 빈 배낭 하나였으나, 어느새 꽉 찬 배낭이 두 개다. 큰 배낭은 짊어지고, 작은 배낭은 배 위에 걸친다. 그러고도 모자라 양손에 비닐봉지 하나씩을 들고 있다.
이 모든 게 18년 전부터 시작됐다. 중국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판화(古版畵)에 푹 빠졌다. 목판이며 인쇄물이며 서책이며 가리지 않고 서울과 중국을 왔다 갔다 하며 수집 원정을 다반사로 하게 됐다.
배가 고프면 짜장면 한 그릇으로 허기를 때우고, 터미널에 가는 택시비가 아까워 전철을 타기 위해 수십 ㎏이나 되는 목판을 지고 이고 손에 들고, 지하 계단을 오르내린다. 늦은 밤 명주사에 돌아와 모두가 잠이 든 후 목판을 닦고 만지면서 먹물을 묻혀 한지에 인출할 때 그 희열이란!
하지만 이런 희열도 수집한 목판을 공개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고 토론할 때의 즐거움보다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말이 떠오른다. '수집은 사유를 못 벗어난 것이고, 수집품을 일반에게 공개하거나 박물관에 진열하는 행위야말로 선행이요 나눔이다.' '수집가의 종착역'이라는 박물관이야말로 새로운 정보와 아이디어를 나누는 '창의력 발전소'일 것이다.
- 조선일보 2013.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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