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사마(배용준)나 근짱(장근석)이 왔으면 이 자리가 터져나갔을 텐데 역시 책의 시대는 아닌가 보네요. 독서축제는 이제 소수자들의 축제가 된 것인가요.”
4일 오후 일본 도쿄 오다이바(お台場) 빅 사이트 전시장. 이어령(79) 전 문화부 장관이 농담을 던졌다. 그의 재치 있는 한마디에 객석에서 박수와 웃음이 터졌다.
이 전 장관은 이날 일본의 지성으로 불리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73)와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이 함께한 행사장에는 ‘한일 거장의 만남’이란 문구가 붙었다. 그들을 연결한 건 2013 도쿄국제도서전. 올해로 20회를 맞은 도쿄도서전에서 한국이 처음 주빈국으로 초청받았다. 두 석학은 ‘디지털 시대, 왜 책인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다치바나는 일본에서 ‘우리시대 최고의 제너럴리스트’‘지(知)의 거장’으로 꼽힌다. 인문·사회 분야를 뛰어넘어 뇌과학과 정보학·우주공학에까지 이르는 방대한 저술활동으로 유명하다. 자신이 소장해온 3만 여권의 책을 보관하기 위해 도쿄에 지상3층 지하1층의 빌딩(일명 고양이빌딩)을 직접 지은 독서광으로도 유명하다.
둘도 없는 책 마니아인 두 사람은 ‘디지털시대의 책’이란 주제에 얽매이지 않았다. 책과 독서, 그리고 인생에 얽힌 추억담도 술술 풀어놓았다. 그들의 격의 없는 얘기에 150여 청중이 숨을 죽였다.
이 전 장관은 어머니와 어린 시절의 일화부터 소개했다.
“첫 책은 돌상에서 들어올린 책이었다. 그 다음은 어머니께서 읽어 주신 책들이었다. 어머니의 말과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수많은 모음과 자음에서 난 상상력을 길렀다. 내 나이가 여든이니 정말 에누리 없이 80년간 책 체험을 해온 셈이다….”
그는 “글이란 말의 어원은 ‘긁는다’는 뜻이다. 암벽을 긁고, 흔적은 남기는 것이다. 글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말은 사라지지만 긁은 것은 남는다. 그리움처럼 긁히고, 상흔이 남는 것이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상흔이 남는다”며 책의 생명력을 예찬했다. 다치바나는 반대로 최근의 에피소드로 입을 열었다.
이달 20일 일본에서 개봉 예정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의 신작 ‘바람 불다(風立ちぬ)’ 이야기였다. 다치바나는 이번 영화 팸플릿에 추천글을 쓰게 됐다고 한다. 불과 2400자 분량이었고, 그나마 삽화나 사진이 들어가면 글자수는 더 준다.
하지만 이 얼마 안되는 작은 글을 쓰기 위해서 그는 엄청난 분량의 책을 사 읽었다. ‘바람 불다’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의 전투기 제작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다치바나는 추천사를 쓰기 위해 과거 전투기 제작과정을 그린 역사책, 전투기 소재인 알루미늄 합금을 다룬 전문서적, 영화에 등장하는 과거 실존인물의 자서전 등 수십 권을 읽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2400자를 쓰기 위해 산더미 같은 책을 사 읽는 것처럼 글쓰기의 기본은 독서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앞으로도 책은 계속 나올 것이다. 그것이 인류의 문명을 유지시키는 힘이다”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다치바나는 “트위터의 140자를 읽기보다, 적어도 A4 두 장 분량의 글을 읽거나 새로 나온 책 한 권을 읽는다면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의 수준이 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날 대담의 주제처럼 디지틀 시대에 위기를 맞은 책과 독서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 전 장관은 “종이책을 단순히 사이버 공간에 옮겨 놓으면 전자책이 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 어머니가 읽어주는 책처럼 시각과 청각으로 느낄 수 있는 전자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의 몸’과 같은 아날로그적 촉감을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합체된 ‘인터페이스’혁명이 일어나야 한다는 지론을 재차 강조했다.
다치바나는 “알고 싶어하는 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다. 더 알고, 또 더 알고 싶어한다”며 “인간의 이런 지적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 한, 또 인간의 뇌구조에 변화가 오지 않는 한 책의 세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거들었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도 포함됐다.
이 전 장관이 강조한 건 아시아인이 공유할 수 있는 ‘집단기억’의 중요성이었다. “같은 히로시마라고 해도 일본인은 원폭의 기억만 갖고 있고, 한국인·중국인은 청·일전쟁의 대본영으로서의 히로시마를 기억한다. 과거를 극복하기 위해선 서로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는 아시아 공통의 집단기억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다치바나는 “한국인의 감정을 일본이 언제 이해하게 될지,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지 모른다”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했다.
(서승욱 기자)
◆이어령=1934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문리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이화여대 문리대 교수, 1990년 초대 문화부 장관,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역임. 현재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이자 본사 상임고문. 저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느껴야 움직인다』 등.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1940년 일본 나가사키 출생. 논픽션 작가·평론가. 도쿄대 불문과 졸업. ‘일본 사회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불린다. 교양과 지식의 가치를 옹호해왔다. 저서 『21세기 지의 도전』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지식의 단련법』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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