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유출 심각…“아카이브 설립 시급하다”
귀중한 문화재가 해외로 유출돼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럼에도 그 삼엄한 경계를 뚫고 심심치 않게 물건들이 빠져나간다. 그런데 문화재 못지 않게 중요한 유형·무형의 물건들이 아무런 경계도 없이 또는 공공연히 나라를 빠져나가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각종 민속 자료를 포함한 전통문화 관련 자료들에 대한 당국과 국민의 이해가 부족한 것을 틈타, 종종 이들 자료가 해외로 흘러나간다.
얼마 전, 국내 한 공중파 방송사의 전임 프로듀서가 자신이 평생 모은 학술 자료를 수십억원을 받고 일본 사람에게 팔아넘겼다. 해외로 빠져나간 자료는 국내 민속사 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영상 자료들이다. 일찍이 민족 공연 문화의 중요성을 간파한 이 프로듀서는 방송사의 풍부한 기술 지원을 받아 전국을 다니면서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원형 자료들을 수집했다. 이 자료들은 그 희귀성으로 인해, 충분한 장비가 없어 자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던 해당 분야 학자들에게 더없이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자료가 순식간에 해외로 빠져 나가버린 것이다. 자료를 사간 사람은 일본 오사카 시의 한 박물관 직원이라고 알려졌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국내의 관련 학자들은 못내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혹자는 그 프로듀서를 매국노라 질타했다. 하지만 사정을 듣고 보면 그럴 법도 하다 싶다. 국내의 수집가나 어느 기관에 내놓으려 해도 아무도 그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일본인이 그 가치를 알고 채간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소문도 돌았다. 경희대학교에 계시던 한 민속학자가 돌아가신 뒤, 그가 평생을 걸쳐 모았던 무속 자료들이 또다시 일본인에게 수백억원에 팔려 나갔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유족에게 물으니 자신들도 그런 소문을 듣고 놀라는 중이라고 했다. 분명 일본의 식민 도깨비가 다시 나타난 것이리라. 아무도 모르는 소문이 그저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문제들을 과연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막연한 듯하지만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이미 그 해답을 내놓은 지 오래다. 나라가 이를 받아주지 않고 태만해서 생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자료들을 다루는 기관과 개념이 이른바 ‘민속 아카이브(archive)’ 혹은 ‘민속 자료관’이다.
그럼 민속 아카이브는 무엇을 하는 곳일까. 우선 전 국립민속박물관 관장을 역임했고,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김종철씨의 말을 들어보자. “민속 자료를 통합 관리하는 자료 센터가 한국에는 없고, 개인 소장가의 귀중한 문화 자료, 학술 자료가 분산 또는 인멸되고 있으며, 유무형의 민속 자료, 민속 문화재, 사진 또는 영상·녹음 자료 등의 관리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이두현씨도 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전력투구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해방 후 제1세대인 민속학자들은 대부분 고희를 넘겼고, 그들이 상대한 제보자들도 대부분 작고했다. 그들이 조사하고 채집한 자료들-필드 노트(field note)며 녹음테이프, 사진과 슬라이드 등은 개인 소장품으로 간직하고 있으나, 이들 민속 및 무형 문화재 자료들을 수합해 정리하고 아울러 국가의 각 기관의 분산된 자료들을 모두 국립민속자료기록보존소가 관리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귀중한 자료들이 산실될 우려가 짙다.’
“원형 콘텐츠 보존돼야 문화 산업도 발전”
현재 민속 및 무형 문화재에 관한 정책은 몇 갈래로 분산되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문화재청의 무형문화재과,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예능민속실, 문화관광부의 전통지역문화과, 문화재보호재단 등에 분산되어 있으며, 이들 기관은 그 기능이 서로 겹치기도 하고 중복도 심하다. 그런데 그 어느 기관도 민속 아카이브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지는 않다.
그나마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이를 심각히 여겨 차선책으로 조그만 공간을 마련해 얼마 전까지 아카이브 흉내를 내 운영하더니 요즘은 그 기구마저 없어졌다. 민속연구과의 연구원 중 몇몇이 아카이브의 이름으로 기증된 자료를 분류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 듯하다. 날로 사라져가는 민속 자료와 이를 잘 보관하고 있는 전문가들이 모은 아카이브 자료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해야 하며, 관련 기관의 설립이 하루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것은 이들 자료에 대한 문화콘텐츠화와 문화정보화이다. 최근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유형의 디지털 정보가 증가하고 이러한 유형의 자료가 정보원으로서 중요하게 되었다. 도서관·아카이브·박물관 등지에서 이러한 유형의 자료를 수집·저장·접근·관리하는 데 대한 관심은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이다.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이러한 디지털 컬렉션을 장기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도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을 중심으로 문화원형콘텐츠 사업을 시작했다. 이미 늦은 일이긴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방송사 프로듀서가 조금만 더 참고 견뎠더라면 더 큰 돈을 만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국가가 문화 콘텐츠라는 사업을 막 시작하기 전에 팔아 넘겼기 때문이다. 그것이 콘텐츠화가 되었더라면 원본을 넘기지 않고도 콘텐츠를 제공하고 저작권료를 넉넉하게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만큼 정부의 노력과 결실은 괄목할 만한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지원을 해야 하며 관심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다만 민속학계에서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의 문화원형콘텐츠 사업에 대해 기대 못지 않게 우려도 하고 있다. 원래 이 사업은 담당 기관의 명칭도 그렇듯이 산업의 진흥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의 문화원형콘텐츠와는 거리가 있다. 민속 아카이브의 설립을 기대하는 처지에서 볼 때 산업적 활용과 순수한 콘텐츠 개발이 이원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전통문화 자료를 원형 그대로 수집·보관·분류하는 민속 아카이브가 설립되어야만 현재 국가적으로 수행되는 문화 콘텐츠 개발도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곳곳에서 식민의 망령이 호시탐탐 우리의 민족혼, 민속 자료들을 노리는 상황에서 이를 보존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문화콘텐츠 사업과 아카이브 구축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지속되어야 한다. 민속 아카이브 설립 논의는 아직 그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어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한다. 더불어 민속 자료 등 콘텐츠 확보에 투자를 계속해야 한다. 문화 콘텐츠를 개발하고 정보화하며, 민속 아카이브를 만들어 이들을 연계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우리 민족혼을 담고 있는 자료들의 온전한 전승과 활용이 가능할 것이다.
이정재(경희대 국문과 교수, 민속학)
-시사저널 2005. 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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