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 ‘고문헌 추적자’ 콤비…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승준 책임연구원-김학수 국학자료연구실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의 안승준 책임연구원(왼쪽)과 김학수 국학자료연구실장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고문헌 추적자’ 콤비다. 두 사람이 장서각에서 한문 초서체로 쓰인 수백 년 된 고서를 소설책 훑듯이 술술 읽으며 환담하고 있다. 성남=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2002년 4월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 경주 손씨 종택. 평소 같으면 고즈넉한 고택이 이날은 유난히 떠들썩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장서각 소속 연구원들이 이 집에서 수백 년간 전해 내려온 다량의 고문헌을 기탁 받으러 온 것.
고문헌 포장을 지휘하던 안승준 책임연구원(53)의 눈에 낡은 라면박스 하나가 들어왔다. 종손 손성훈 씨에게 라면박스의 정체를 물었다. “몰라요. 아버지가 내버리려고 치우셨나 봐요. 좀 있다가 버릴 거예요.”(손 씨) “뭔지 모르지만 일단 가져가서 정 쓸모없는 것이라면 제가 버릴게요.”(안 책임연구원)
라면박스에 담긴 너덜너덜한 고서는 이듬해 국내외 학계를 발칵 뒤집었다. 1346년 완성된 원나라의 마지막 법전 ‘지정조격(至正條格)’으로 밝혀진 것.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원나라 법전이었다. 600년 넘게 미라처럼 보관돼 있던 지정조격이 안 책임연구원의 촉(觸)으로 긴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장서각에는 ‘고문헌 추적자’ 콤비가 있다. 안 책임연구원과 김학수 국학자료연구실장(46)이다. 국내 학계에서 민간 고문헌을 가장 많이 수집·연구하는 전문가라고 소문난 이들은 한자를 흘려 쓴 초서에 능통한 데다 웬만한 집안의 족보와 혼맥, 학맥, 인맥까지 줄줄이 꿴다. 한중연에서 한국사 석사·박사 학위를 받은 이들은 장서각이 1993년 시작한 민간 고문헌 수집 사업을 20년째 도맡아 왔다.
김 실장과 안 책임연구원은 장롱 속에서 수백 년간 잠자고 있는 고문헌을 찾아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사실을 깨워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한다. 보물로 지정된 ‘동춘당 송준길 필적’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은 이들이 발굴한 고문헌이다. 안 책임연구원은 일본에서 김시민 장군의 공신교서를 발견해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회수하는 데 기여했다. 장서각은 지난 20년간 61개 가문의 고문헌 4만4000여 점을 기탁 받았으며, 현재 이들을 포함해 15명이 일하고 있다.
지난달 26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한중연 장서각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이 콤비는 무엇보다 장서각의 고문헌 기증·기탁 사업을 처음 추진했던 스승 이성무 한중연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덕분에 수많은 고문헌이 빛을 보고 발굴 노하우도 전수됐다며 스승을 치켜세웠다.
어느 집에 어떤 고문헌이 있는지 어떻게 ‘냄새’를 맡을까. 이들은 각 가문의 족보를 꿰뚫는 보학(譜學)에 정통하다. 안 책임연구원은 “주요 가문들의 족보는 물론이고 결혼과 벼슬, 학파, 정파로 이어지는 인적 네트워크를 꿰고 있으니 연관 문서들이 고구마줄기 캐듯 딸려 나온다”며 “각 지방의 향토사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그 지방에서 발굴된 고문헌에 대한 정보도 수시로 얻는다”고 말했다.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고문헌을 소장한 집을 찾아간다고 해서 이들에게 가문의 보물을 쉽게 내줄 리 없다. “경북 안동의 한 종갓집에 찾아갔더니 종손이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이었어요. 저희를 과수원에 세워두고 두 시간 넘게 농약만 치더라고요. 이런 일은 예사죠. 조상의 초상화를 기탁할 땐 자손들이 ‘할아버지 출타하신다’며 초상화 앞에서 고유제를 지낸 뒤에야 장서각으로 옮깁니다.”(김 실장)
종손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문서가 따라 움직이게 만드는 비결은 ‘신뢰’라고 이들은 말한다. 주로 명망 있는 종갓집을 찾아가기 때문에 전통 예법대로 행동하는 것은 기본이다. “밥을 사야 할 때와 얻어먹을 때를 잘 가려야 해요. 공공기관 소속 연구자가 청렴해야 한답시고 무턱대고 밥을 사려고만 들면 종손으로선 기분이 나쁠 수 있어요.”(김 실장) “쇠고기를 한 근 끊어 가든지 술을 한 병 사가는 것은 당연하고, 집안 분들의 경조사도 챙기면서 10년 넘게 친분을 이어가지요.”(안 책임연구원) 이렇게 한 번 쌓은 신뢰는 다른 가문에까지 입소문이 퍼져 먼저 고문헌을 기증·기탁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도 많아졌다.
고문헌을 기탁한 어르신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장서각에 찾아오거나 사사로운 부탁을 해와 난처할 때도 있다. 2000년대 초 고문헌을 기탁한 한 가문의 팔순 넘은 종손이 추운 겨울 한 달 동안 매일 장서각에 찾아온 적도 있었다. 안 책임연구원은 연구실 바닥에 장판과 담요를 깔고 노인 옆에 앉아 공부하면서 노인이 후손들 욕하는 것도 들어주었다. 훗날 이 노인이 치매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니 가족도 못 알아보던 노인이 “안 박사 왔나” 하고 알아봤다고 한다.
각 고문서의 가치를 점수로 매겨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소장 가문의 입장에선 하나하나가 다 귀중하기 때문. “집안의 적자와 서자가 따로 관리한 문서나 전쟁으로 흩어진 문서가 수백 년 만에 장서각에서 만나 하나가 될 때 가장 기쁩니다.”(안 책임연구원)
정작 자신의 집안에는 신경을 못 썼다는 자책도 나왔다. “1990년대 후반 저희 가문이 소장한 고문헌 500여 책을 싹 도둑맞았어요. 방방곡곡을 다니며 남의 집 고문헌을 수집한답시고 저희 집안에는 소홀했으니….”(김 실장)
성남=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 동아일보 2013.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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