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03-06 10:04
책장 펼친 듯한 ‘열린 공간’… 문화·지식·예술이 통하다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http://www.segye.com/newsView/20240304513613 [141]

(사진1 열린 구조의 열람실과 전시공간, 지역 내 신진 작가들을 위한 작업실 그리고 자료 보관 섹션이 공존하는 의정부미술도서관은 다양한 방식으로 책의 본질인 지식과 경험의 ‘공유’를 구현하고 있다.)
(사진2 내부)
(사진3 외부 도서관 모습)

(29) 공공도서관의 진화, 의정부미술도서관

책은 ‘공유’ 기반한 지식·경험 플랫폼
의정부미술도서관도 ‘공유’ 키워드로
열린구조·개방·연결·융합 모두 구현
화장실·계단실 제외 별도 구획 없어
“동네 도서관이자 기록·박물관 역할”


책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이나 경험을 책을 통해 누군가와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책을 읽는 이는 책에 담긴 지식과 경험을 나누어 받고자 한다. 그래서 책은 ‘공유’를 기반으로 하는 지식과 경험의 플랫폼이다.

책의 이런 역할을 두려워했던 누군가는 불온서적 또는 금서로 지정한 뒤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 책을 숨기거나 때로는 한데 모아 불태웠다. 대개 다른 생각을 허용하지 않는 닫힌 사회에서 이런 사건이 횡행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책을 불온서적이나 금서로 지정하려면 누군가는 그 책을 읽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비록 온전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책이 담고 있던 지식과 경험, 최소한 책의 존재 자체를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었다.

특정 권력 집단이나 제한된 소수를 위해서가 아닌 시민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은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등장했다. 실제 그렇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공공도서관은 지식을 공유하여 시민들의 교육 수준을 높이자는 사회적 움직임을 드러내기 위해 ‘열린 구조’로 지어졌다. 서가로 둘러싸인 탁 트인 공간에 시민들이 책을 읽는 장면은 그렇게 도서관의 전형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영화 ‘해리포터’의 배경이 된 롱룸(Longroom)도서관이나 미국 최초의 공공도서관인 보스턴 공공도서관 그리고 뉴욕 공공도서관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공공도서관은 오랫동안 독서실의 역할을 대신해 왔다. 그래서 서가가 있는 개방된 구조가 아닌 서고와 열람실이 분리된 형태로 지어졌다. 열람실은 칸막이가 있는 책상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시험 기간이 되면 자리를 맡기 위해 책을 빌려왔다. 도서관은 시험공부를 하러 가는 곳이었지 책을 읽으러 가는 곳은 아니었다.

그러다 도서관의 모습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칸막이가 설치된 책상이 있었던 열람실이 점차 사라지고 열람(reading)을 위한 책걸상은 서가와 함께 넓은 공간을 이루었다. 도서관 안에서 공간을 구획하는 벽도 점차 없어지면서 도서관 전체가 ‘개방’된 공간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영유아를 위해 별도로 마련한 어린이 서재도 성인들이 이용하는 서재와 나뉘지 않고 ‘연결’되었다. 어떤 공공도서관은 3D프린터가 설치된 메이커스페이스(Maker space)나 미술관과 같이 얼핏 보면 도서관과 상관없어 보이는 시설들이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융합’되었다.

‘열린 구조’, ‘개방’, ‘연결’, ‘융합’은 모두 책의 본질인 ‘공유’가 발현되는 방식이다. “모두에게 열린 미술전문도서관”을 표방하며 2019년에 개관한 의정부미술도서관도 ‘공유’를 키워드로 하기에 ‘열린 구조’, ‘개방’, ‘연결’, ‘융합’이 모두 구현돼 있다.

의정부미술도서관에는 화장실, 계단실 등을 제외하면 별도로 구획된 공간이 없다. 1층에 오픈 스테이지(open stage)나 예술자료 존은 높이가 다른 서가로 자연스럽게 나뉘어 있고 2층에는 성인들이 이용하는 서재와 아이들이 이용하는 서재가 흐릿한 경계를 이루고 있다. 3층에 독립성을 요하는 다목적실, 사무실, 프로그램실, 작업실은 유리벽이나 벽을 회전시킬 수 있도록 해서 상황에 맞춰 ‘연결’될 수 있도록 했다. 설계를 맡은 디앤비(D&B)건축사사무소는 “책장을 펼친 듯한 ‘열린 평면’을 통해 문화, 지식, 예술이 소통될 수 있기”를 바랐다.

3층 멀티그라운드(Multi Ground)에서는 의정부미술도서관이 열린 구조를 통해 각 공간 간의 ‘개방’을 지향한다는 것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세 개 층이 트여있는 1층 아트그라운드(Art Ground)의 에코열람실과 2층 제너럴 그라운드(General Ground)에 있는 크고 작은 열람실뿐 아니라 도서관 남쪽에 있는 하늘능선근린공원의 풍경까지 이곳에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타 공공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의정부미술도서관도 공원시설 중 하나인 교양시설로 지어졌다. 교양시설로 지어진 공공도서관들은 대부분 공원 옆에 있다는 입지를 활용해 옥상정원이나 테라스 같은 휴게공간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의정부미술도서관에서는 한쪽 면을 가득 채운 창을 통해 책을 읽고 있는 자리에서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설계자는 공원을 향한 창을 통해 도서관이 “자연을 담고 뻗어 나가는 확장의 공간”이 될 수 있기를 의도했다.

의정부미술도서관은 ‘2020 한국건축문화대상’ 준공건축물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발주처의 열정이 어떻게 결과로 나타나는지 보여주는 좋은 공공시설물이다”라고 시작하는 심사평에는 책임 있는 담당자의 부재와 사업 전반의 내용을 파악하기 힘든 순환 보직의 문제를 해결한 의정부미술도서관의 과감한 도전이 언급돼 있다. 실제 의정부미술도서관이 탄생하기까지 사업을 주도한 인물이 있는데, 현재 의정부시 도서관과를 총괄하고 있는 박영애 과장이다.

23년간 사서로 근무했던 그는 건축 담당 부서가 아닌 도서관 운영전문가이자 지역의 사정을 잘 아는 사서가 도서관 기획을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 날 때마다 해외 도서관을 탐방한다는 그는 의정부미술도서관의 전신이었던 민락동 공공도서관 건립을 맡았다. 2014년에는 건립 타당성 및 기본계획 연구를 통해 민락동 일대가 과거 미군의 주둔지여서 문화적으로 소외되어 왔기 때문에 문화와 예술이 ‘융합’된 복합문화공간으로 도서관의 건립 방향을 설정했다.

박영애 과장은 꽉 막혀 있던 기존 도서관 공간의 문제를 건축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도서관 건립을 위한 현상설계에서 선정된 설계 원안을 가능한 한 유지하기 위해 의정부시와 건축가 사이의 가교역할을 맡았다. 그는 사서들이 도서관 계획과 함께 건축에 대해서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자신도 대학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우리나라의 공공도서관이 변하기 시작할 때쯤 도서관(Library), 기록관(Archives), 박물관(Museum)의 기능이 융합된 ‘라키비움(Larchiveum)’이라는 개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도서관, 기록관, 박물관은 책의 ‘공유’ 역할이 확대된 기능들이다. 의정부미술도서관도 기본적으로 공공도서관에 1947년에 창립한 신사실파와 관련된 550여 점의 희귀자료, 하와이 미술관, 이준 전 리움미술관 부관장, BTS의 멤버 RM이 기증한 자료들이 보관돼 있는 섹션, 다양한 주제의 기획전이 열리는 전시공간이 함께 있는 일종의 라키비움이다. 하지만 의정부미술도서관의 가장 큰 가치는 동네 주민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와 예술과 문화를 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엄마와 아이가 한 공간에 함께 앉아 각자가 골라온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을 보며 앞으로 공공도서관이 어떻게 변화될지 상상해 봤다.

- 세계일보 2024.3.5 방승환 도시건축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