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4-10 15:18
30년간 1500종 2500병… 캬∼! 마음까지 불콰해집니다 - 소주 수집가 이규협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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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주 1500여 종을 수집한 이규협 씨가 지난 2일 경기 안산시 고잔동 자신의 집에서 소주의 변천사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공무원 퇴직 후 소주박물관과 테마파크를 조성하기 위한 구상을 하고 있다. 안산 = 김연수 선임기자 nyskim@munhwa.com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소주(燒酒)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모아 오고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에 나온 ‘소주’ 1500여 종을 수집한 50대 중반의 공무원이 있다. 주인공은 경기 안산시청 유비쿼터스 정보센터에 근무하는 이규협(55) 씨. 이 씨는 경기 안산시 단원구 고잔동 집 안 방 한 칸과 거실 한쪽 장식장을 각종 소주로 채우고도 모자라 30병들이 상자 8개에 담아 30년째 보관하고 있다. 장식장에는 진로, 금복주, 보배, 보해, 경월, 무학, 선양, 해태, 대선소주 등 40∼60대 애주가들에게는 ‘아, 그거’하고 탄성이 나올 정도로 친숙한 소주뿐 아니라 북한 소주, 지금은 보기 어려운 4홉들이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이 씨는 “1983년 우연히 ‘조선시대 왕이 술을 먹는 사람의 목을 직접 베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도대체 술이 뭐길래’라는 생각이 들어 수집을 시작하게 됐다”며 “그중에서도 서민의 애환이 담겨 있는 소주만을 모으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후 같은 해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국풍 83’에 참가해 지역에서 올라온 각종 옛 소주와 현대식 소주를 모으기 시작했다. 주말과 지방출장을 이용해 틈틈이 모은 소주가 우리나라 소주와 북한, 일본, 중국 등 4개국 소주 1500종류 2500병에 이른다. 여기에다 그는 각종 미니 소주와 각 회사가 내놓은 소주잔, 홍보용 앞치마, 소주상표, 소주홍보용 로고송까지 수집하는 소주 관련 물품 수집 마니아다.

소주란 곡류를 발효시켜 증류하거나, 에탄올을 물로 희석해 만든 두 가지 종류의 술을 모두 이르는 말이다. 현재 소주는 보통 값이 싸고 대중화한 희석식 소주를 말한다.

이 씨는 소주를 모으기 시작할 때부터 제조사, 이름, 용량, 출고 가격 등에 사진과 맛에 대한 평가까지 곁들여 수록하고 소주 관련 기사를 스크랩해왔다.

그가 현재까지 모은 것만 해도 소주박물관을 하나 만들고 남을 정도다. 이 가운데는 우리나라 주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이색적인 소주와 의미 있는 것들도 포함돼 작은 전시관을 방불케 한다.

1990년대 중반 한·일 간 독도 신경전이 벌어졌을 당시 금복주에서 생산한 ‘독도’는 1병당 10원의 독도후원기금이 포함돼 서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면서 날개 돋친 듯 팔렸던 화제의 소주. 또 ‘김삿갓(보해)’ ‘정이품(합동)’ ‘이몽룡(보배)’ ‘태백이(무학)’ ‘영의정(금복주)’ ‘황진이(선양)’ 등은, 제조사마다 최초로 검은 병 소주를 잇달아 출시한 뒤 치열하게 각축했던 ‘소주 전쟁’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삼학’에서 미국 현지 공장을 세워 생산해 역수입한 ‘삼학’ 소주, 일본으로 수출돼 인기를 끌었던 ‘진로’ 소주, 미국이 생산해 한국으로 수입된 ‘님버스(NIMBUS)’는 애주가들에게도 생소할 듯하다. 1980년대에 수출용으로 생산된 진로소주와 2002년 월드컵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축구공 모양의 진로소주도 보관하고 있다.

이 씨는 “이제 애주가들의 볼거리를 만들기 위해 그동안 모은 소주 역사를 정리할 때가 됐다”며 “지금도 시골 작은 가게 등을 돌며 오래된 소주를 찾아 다니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소주에 대한 역사도 들려줬다. 이 씨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는 18개의 소주 회사가 서울을 비롯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제주도 등에 각각 근거지를 두고 저마다 특색 있는 소주를 생산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한 소주가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때는 1920년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소주도 수많은 변화를 겪으며, 각 지방에서 서민들의 애환과 함께했다고. 그는 소주가 고려시대 말(1280년) 몽골과 만주를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당시 소주는 고급 술이었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자주 마실 수 없었단다.

이 같은 ‘고급 술’ 소주가 서민들의 술로 탈바꿈한 것은 20세기 들어 상품화하면서부터라고 한다. 192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일반 가정에서도 소주를 만들어 마실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1920년대 우리나라에는 3175개에 이르는 소주 제조업체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였던 시대상황 탓에 이들 업체의 76% 정도는 사실상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본 회사였다”며 관련 자료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 씨는 또 이전에는 30도의 독한 소주가 유행하다가 지난 1974년부터 25도 소주가 등장한 데 이어 현재 16.5도까지 낮아지는 등 도수 낮추기 전쟁도 거듭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씨는 “소주가 변해온 모양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서민들의 삶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면서 “더 오래된 술을 수집하고 우리나라 소주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하겠다”며 빙그레 웃었다.

(김형운 기자)

- 문화일보 2013.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