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7-15 10:44
[편완식이 만난 사람] 고미술 수집가 황규완씨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130714021… [562]

‘도자기의 나라’라고 하면서도
관련 춤 하나 없는 게 안타까워
8월 佛서 첫 공연… 10월 한국에

관광경영학을 전공한 젊은이는 호텔에 취직한다. 돈벌이도 제법 괜찮아 모두들 부러워했다. 하지만 본인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호텔매니저로 만족하기엔 가슴이 너무 뜨거웠다. 관광의 원천인 문화콘텐츠에 마음이 더 쏠렸다. 어느 시기부터 한국 도자에 빠져들었다. 골동을 사들이고 연구소를 만들어 도자 공부를 했다. 신안 해저유물 발굴 땐 수중탐사 자문에 나섰다. 수중 잠수에도 일가견을 가져 전문학교까지 세우려고 했다. 필리핀 해상에선 중국 원나라와 명나라 시절 유럽으로 향하다 좌초된 유물선을 인양해 원대와 명대 도자기를 수중에 넣기도 했다. 당시 내로라하는 일본인 골동 도자 수집가들이 그에게 몰려들었을 정도다.

언제부터인가 달항아리 사랑에 빠져들었다. 한동안 달항아리를 직접 굽고 화폭에 그리던 그가 이번엔 달항아리 춤을 기획하고 있다. 스스로를 ‘허튼짓’만 해왔다고 털어놓는 황규완(70) 고미술 수집가의 인생 이야기다. 그의 아내는 버린 돈을 쌓아 놓으면 큰 아파트를 5만원권으로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푸념을 하지만 그의 허튼짓은 멈추지 않고 있다.


한국문화 콘텐츠를 찾아 나서면서 고미술 수집가가 된 황규완씨는 “춤의 언어로 달항아리의 미학을 새롭게 풀어내는 작업에 가슴이 설렌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해외 공관에 달항아리를 그려 보내주느라 바쁘다.


“삶이란 어차피 허튼춤이 아닙니까. 중국 못지않은 도자 왕국이었던 나라에 시기별·형태별로 도자 전집 하나 없는 것이 안타까워 다시 허튼춤을 추기로 한 것이지요.”

그가 일의 단초로 주목한 것은 달항아리다. 달항아리의 조형성을 대중과 세계인에게 친숙하게 스며들게 한다면 누군가는 나서 일을 해낼 것이란 믿음에서다.

“한국인의 정서와 품성에 맞는 도자기라면 단연 18세기 관요 금사리가마에서 제작된 백자큰항아리라 할 수 있습니다. 달항아리라 불리는 이 항아리는 그 조형과 색에서 세계 최고의 경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달항아리는 수백 조각으로 파손된 것을 수년간 복원하여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조선도자기에 심취했던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도예가 버나드 리치(1887∼1979)가 소장했던 달항아리는 영국박물관에 자리 잡고 있다. 달항아리가 우리나라 지정문화재 중 동일 종으로 9점이나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된 경우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세계의 유수한 박물관들은 달항아리 한 점쯤은 소장해야 한다는 염원이 있습니다. 세계 도자 미술품의 극치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지난해 의정부예술의전당에서 재불 현대무용가 남영호의 ‘이 시대의 우리 춤-한국여자’ 솔로공연을 관람한 후 ‘달항아리’ 창작무용을 의뢰하게 된다.

“도자왕국이라 하면서 왜 도자기와 관련된 춤이 없는지 심히 안타깝게 생각하던 차에 남영호의 춤을 보고 제안하게 됐어요.”

공연의 영상, 조명, 무대장치와 의상은 프랑스 스태프들이 참여하게 된다. 음악감독과 작곡은 서울대 최우정 교수가 맡는다. ‘달항아리’ 춤의 테마는 어느 나라 사람이라도 공감할 수 있도록 한류 ‘브랜드 춤’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달항아리 춤은 달항아리의 조형성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달항아리는 아래와 위 두 개로 나누어 만드는데, 이것은 보이지 않는 만물의 근원인 음양의 조화, 즉 태극을 상징합니다. 달항아리가 연출하는 조형적 리듬은 선이 굵고 유연하며, 흰색 바탕의 순하고 천진한 맛의 어우러짐입니다. 또한 두 덩어리가 불 속에서 구워지면서 비정형성의 8각 구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둥근 것 같으면서도 8괘를 담고 있는 형국입니다. 자연의 질서와 질박함과 의연함을 보여주고 있지요.”

결국 흙과 불, 물과 나무, 유약이 만나 조화롭게 표현된 것이 달항아리의 미학이란 얘기다. 세상의 고난·번뇌·풍파의 인생이 불을 상징한다면, 그곳에서 각기 다른 성이 합일하기 위해 양보하고 보완하고 배려하여 만들어진 것, 자연의 형상을 닮아 그 모습 그대로 자연스러운 것이 달항아리라는 것이다.

“달항아리는 한민족의 성품이 흠뻑 밴 조형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춤으로 표현한다면 또 하나의 한민족의 얼이 담긴 국가브랜드가 될 수 있습니다.”

19세기 들어 만들어지지 않은 조선 달항아리는 생각처럼 흔한 것은 아니다. 전 세계에 현존하는 공개된 달항아리를 모두 합쳐도 30여 점에 불과할 정도로 아주 희귀하다.

“뽐내지도 으스대지도 않으며 순수하고, 정겨운 가운데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모습이 달항아리입니다. 성인과 같은 진중함 속에 무언으로 전달하는 백색과 원의 조형미야말로 우리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공예미의 극치라 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는 달항아리의 미학은 노자의 무위자연이라 했다. 노자는 직접적으로 미학에 대해 이야기한 바는 없다. 도덕경 속에서 천진하고 질박한 그리고 기운생동의 미를 무위자연으로 정리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달항아리를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려청자가 아무 공간에서나 잘 어울리지 못하는 귀족적인 미라면, 달항아리는 어느 공간 어느 자리에 놓아도 함께 화합이 가능한 선비적이며 서민적인 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놓인 공간감이 건축의 공간만큼이나 여유로움을 발하는 것도 달항아리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감상자에게 선하고 착한 마음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이 달항아리라 했다. 한국미의 특질이라는 것이다.

“한국 미술의 미의식이나 한국 예술의 특색으로 무작위의 미, 무기교의 미, 자연주의, 비정제성, 해학, 자유분방함, 소박, 담백의 미, 비움의 미 등을 들고 있습니다. 한국 미술은 대체로 예술에서 절대에의 숭상과 자신의 이미지 실현이라고 하는 이상보다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레 탄생시킨 예술이라는 데에서 연유한다고 하겠습니다. 서양에서는 일상생활에서의 미와 예술적 미를 구분하여 사용한 데 반해, 우리의 예술은 그 경계가 모호하거나 따로 구별하지 않았다는 데서 달항아리 미감의 특질이 있습니다. 우주와 자연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 되어 삶을 영유하는 화합의 미라 할 수 있지요.”

그는 1972년 조선백자 항아리 기획전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열면서 당시 누구도 관심을 제대로 갖지 못한 달항아리의 조형미에 특별히 주목했다. 전시를 위해 당시 그는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에게 편지를 썼다. 달항아리의 미학적 가치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전시 지원을 부탁했다.

“비서실에서 연락이 와서 달려갔지요. 이 회장은 저를 보고 젊은 친구가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있다며 대견해 하셨습니다. 바쁜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비서진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우라고 지시를 해 전시가 성사되게 됐지요.”

그가 이번에 달항아리 춤을 기획한 것은 어쩌면 그의 삶의 궤적에서 보면 사필귀정이라 할 수 있다. 달항아리 춤 공연은 8월과 9월에 프랑스에서 첫선을 보인다. 10월엔 서울 강동아트센터와 고양 아람누리에서 한국 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그의 서가와 책상엔 한국 조각보와 찻사발 등에 관한 연구 자료들이 쌓여 있다. 여느 중진학자 연구실 못지않은 모습이다. 요즘도 대학 등에서 종종 초청강연을 하기도 한다.

“살아간다는 것이 특별할 게 있나요. 사람들이 허튼짓이라 할지라도 제 열정을 다 쏟게 하는 대상이면 저는 그것을 향해 달려나갈 뿐입니다.”

달항아리 같은 그의 얼굴에서 달덩이 같은 청년의 열정을 본다.


- 세계일보 2013.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