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9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미래를 위한 아카이브 (Archives for the Future)> 컨퍼런스가 열렸다. 총 3부로 진행된 이 컨퍼런스는 열두 명의 발제자와 두 명의 모더레이터가 참여해 온종일 발제와 패널토론을 이어가는 밀도 있는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치뤄졌다. 주최측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컨퍼런스 제목이 ‘아카이브의 미래’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아카이브’인 이유를 설명하면서, 컨퍼런스에서 집중적으로 다룰 주제와 논의의 방향을 보다 명확하게 밝혔다. 아카이브는 과거의 기록을 보관하는 수동적인 저장소가 아니라 다가올 ‘미래’의 이야기를 현재의 시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설계하는 수단으로써 잠재적 에너지를 가진 역동적인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카이브의 재해석을 토대로 컨퍼런스의 주된 목표는 다음과 같이 설정되었다. 첫째, 표준화된 규칙이 지배하는 기존 아카이브의 개념과 여기에 작동하는 정치적 권력관계를 해체하고, 아카이브를 다시 해석하는 대안적, 창의적 접근 방법에 대한 모색이다. 둘째는 이러한 새로운 해석적 틀을 바탕으로 거대 시스템 안에서 누락되거나 보이지 않는 소수의 이야기들을 일깨워 역사적 다양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컨퍼런스의 1부는 ‘미래의 흔적들: 아카이브 리서치에서 시간 뒤집어보기’, 2부는 ‘아카이브 구하기: 전쟁, 재난, 망명으로 인해 소실 위기에 빠진 아카이브를 구하는 방법’, 마지막 3부는 ‘잠재성과 유령론: 어떻게 끊임없이 과거는 미래를 쫓고 미래는 과거를 쫓는가’라는 주제로 아카이브를 바라보는 다양한 이론적, 기술적, 예술적 관점을 폭넓게 조명했다.
최근 영국에서는 아카이브에 대한 학예 연구적 관심뿐만 아니라, 기관 아카이브와 예술가 사이의 실질적 교류에 대한 관심도 커지면서 협업 프로젝트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2012년 터너상(Turner Prize)을 수상한 엘리자베스 프라이스(Elizabeth Price) 는 올해 미술·고고학 박물관인 애슈몰리언 박물관(Ashmolean Museum) 과 협업하여 박물관의 컬렉션 및 아카이브 내용을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이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또한, 얼마 전 공영방송국인 BBC는 그들의 방송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방대한 아카이브 자료를 자유롭게 활용하여 작품을 제작할 스코틀랜드 출신 미디어 작가 여섯 명을 공모로 선발하기도 했다. 이번 컨퍼런스도 이러한 영국 내 분위기를 반영하는 움직임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그간 아키비스트, 연구자, 큐레이터가 모여 공동 현안을 논의하는 소규모 학술행사가 주를 이루어왔다면, 이번 컨퍼런스는 시각예술분야에서 다루는 아카이브 개념과 이를 형상화한 작품에 대한 분석, 미학적 연구만을 집중 조명했다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발제의 내용은 영국에 국한되지 않고 브라질, 레바논, 팔레스타인, 독일과 동유럽에 이르기까지 지리적인 경계 없이 다양한 범위로 이루어졌다.
1부 패널토론, 왼쪽부터 모더레이터 데이비드 커닝햄, 프란시스 구딩, 샘 매콜리프, 페르난다 알베르토니, 수잔 슈플리
1부 패널토론, 왼쪽부터 모더레이터 데이비드 커닝햄, 프란시스 구딩, 샘 매콜리프, 페르난다 알베르토니, 수잔 슈플리
1부 순서는 런던 콘소시움의 필름 큐레이팅 코스 디렉터인 프란시스 구딩(Francis Gooding) 박사의 기조발제를 시작으로, ‘미래의 흔적들: 아카이브 리서치에서 시간 뒤집어보기’라는 주제 아래 세 명의 발제가 이어졌다. 아카이브를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기록, 보존, 전달하는 매체이자 기호로 생각하기보다는 관점과 접근 방법에 따라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적인 해석의 여지가 잠재하는 열린 공간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주를 이루었다. 골드스미스 대학의 샘 매콜리프(Sam Macauliffe) 는 아카이브가 보존하는 과거 흔적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고찰했다. 그는 프랑스 소설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의 소설에 나타나는 ‘흔적(trace)’ 개념에 기초해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지시하는), 흔적은 항상 ‘발생하지 않은 것, 실재하지 않는 것’을 동시에 내포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뒤이어 수잔 슈플리(Susan Schuppli) 는 지구 표면의 환경과 자원을 관측해 데이터 아카이브를 생성하는 인공위성 랜드샛(Landsat)이 수집한 자료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흥미로운 오류를 소개했다. 센서 문제로 특정 시간 동안의 데이터를 손실한 랜드샛은 이후 미래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수집하기 위해 손실된 부분에 과거 데이터를 대체 삽입하여 정보 생성을 이어갔고, 결국 서로 다른 시간대의 데이터가 뒤엉킨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내용이었다. 즉, 랜드샛이 미래 데이터를 수신하기 위해 생성한 ‘플레이스홀더(Placeholders)1)’로 인해 최종 데이터는 정확한 정보로써의 지시성(indexicality)을 상실했음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브라질 리오그란데도술 연방대학의 페르난다 알베르토니(Fernanda Albertoni) 는 브라질 작가 요나다스 데안드라데(Jonathas de Andrade) 의 작품을 중심으로 파편적인 기억을 재구성하고 허구적인 요소를 포함한 아카이브 아트가 어떻게 현대시각예술에서 새로운 형태의 방법론과 비평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이어 ‘아카이브 구하기: 전쟁, 재난, 망명으로 인해 소실 위기에 빠진 아카이브를 구하는 방법’에 초점을 둔 2부에서는 각 발제자의 사례연구를 통해 먼 미래까지 아카이브를 보존시킬 수 있는 생존전략을 공유했다. 골드스미스 대학의 스테펜 크레머(Steffen Kraemer) 는 독일 정부가 핵전쟁이나 여타 재난에 대비하여 먼 미래 세대를 위해 구축한 예비 국가기록 아카이브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논의를 시작했다. 크레머는 이 아카이브가 지속적, 독립적으로 존속될 수 있도록 적용한 전략적 기술과 언어 대신 상징기호를 활용해 만든 비전통적인 방식의 매뉴얼에 대해 설명하는 한편, 보관문서의 선택적 선별, 동시대성으로부터 격리 조치된 기록물의 폐쇄성, 국가기록물의 권위적 목소리에 관한 문제도 함께 제기했다. 이와 함께, 골드스미스 대학의 실비아 몰리치(Siliva Mollicchi) 는 레바논 내전을 기록하는 반허구적인 아카이브 프로젝트로 역사기록의 모순과 빈틈을 성찰하는 레바논 작가 왈리드 라드(Walid Raad) 의 최근 작품분석을 통해, 역사적 사건의 파편적 기록물들이 무궁무진하게 엮어내는 창조적 이야기의 미래적 가능성을 강조했다. 또한, 팸 스켈톤(Pam Skelton) 은 망명과 이주에 관한 아카이브를 적극적으로 리서치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퍼즐 맞추듯 새로운 이야기로 엮어 작품으로 재조명하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1) 빠져있는 다른 것을 대신하는 기호나 텍스트의 일부
그라이즈데일 아츠, <예술의 유익함을 생각하는 예술위원회: 정직한 안양>, 지역 주민이 만든 물건을 판매하는 임시가게
2부 패널토론, 왼쪽부터 니모스케이프의 알레산드라 페리니와 엘리사 아다미, 스테펜 크레머, 실비아 몰리치, 팸 스켈톤
마지막으로 3부 ‘잠재성과 유령론: 어떻게 끊임없이 과거는 미래를 쫓고 미래는 과거를 쫓는가’는 웨스트민스터 대학의 유리엘 올로(Uriel Orlow) 의 기조발제로 시작되었다. 올로는 주로 역사 서술과 기억의 사각지대, 집단 트라우마, 그리고 아카이브 시스템 자체에 대해 질문하는 사진, 영상, 설치작업을 선보이는 작가다. 그가 소개한 자신의 작품 가운데 <보관된 기억 (Housed Memory)> (2000-2005) 과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 (Unmade Film)>(2012-2013) 시리즈는 기록 이면에 ‘보이지 않는 것’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일깨운다. 전자는 세계 최초의 홀로코스트(Holocaust)2) 아카이브인 위너 라이브러리(Wiener Library) 가 보유한 자료를 촬영한 9시간에 달하는 긴 영상 작품이다. 카메라는 방대한 양의 책과 자료가 보관된 선반을 따라가면서 우리의 인식과 지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기록물의 물리적 양과 크기를 비추는데, 이것이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사건의 총체성과 본질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은유하고 있다. 후자는 역사 서술에서 누락된 이야기를 조사, 고증하여 영화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치료를 받던 예루살렘의 한 정신병원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정작 완성된 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영화제작을 위한 모든 과정을 수행하고 그 과정의 자료만 보여주는 일련의 기록물 시리즈다. 이렇게 역사적 기록물이 포착할 수 없는 잠재적 고통의 실체와 두려움의 끊임없는 귀환에 대한 논의는 골드스미스 대학의 소피 호일(Sophie Hoyle) 과 헬렌 카잔(Helen Kazan) 의 발제로 이어졌다. 호일은 영국의 폐허 풍경이나 폐로과정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 인근 호수풍경 등을 담은 영상 및 사운드 작품을 중심으로 냉전시기 핵 공포의 언캐니(Uncanny)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카잔은 레바논 베이루트의 건설업체들이 자국 내 전쟁위험에 대한 불안을 불식시키고 외국인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이상화된 실내 환경 이미지들을 소개하면서 이 이미지 아카이브가 레바논의 유토피아적인 미래와 잠재적 전쟁의 위험성을 동시에 반영하는 시각적 모순과도 같다고 지적했다. 한편, 브라이튼 대학의 주디 프라이스(Judy Price) 는 팔레스타인 자치구역 내 채석광의 돌에 집적된 역사적, 지질학적, 상징적 의미를 아카이브로 해석하고, 이를 통해 이스라엘과의 대립적 관계와 역사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이 지역의 사회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지리정치학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색다른 시도를 보여주었다.
2) 일반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대량으로 태워 죽이거나 학살하는 행위를 총칭하지만, 고유명사로 쓸 때는 제2차세계대전 중 나치스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뜻함
좌) 창의적 농부(존 앳킨슨) 발표장면 우)2002년 개발 전 안양유원지 모습
3부 패널토론, 왼쪽부터 모더레이터 마커드 스미스, 주디 프라이스, 헬렌 카잔, 유리엘 올로
살펴본 바와 같이, 컨퍼런스에서 다뤄진 연구주제들의 다양한 범위와 관점은 보다 확장된 의미의 아카이브 개념과 이에 접근하는 참신한 방법론들을 제시했다. 또한 아카이브에 작용하는 권력관계의 해체, 아카이브 시스템이 드러내는 역사와 기억의 사각지대, 그리고 아카이브의 창조적, 변형적 에너지에 주목했다. 다만, 워낙 광범위한 내용들을 한 자리에서 소화하려다 보니 각 주제별 토론이 심도 있게 진행되지 못한 아쉬움은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논의가 공통적으로 과거의 흔적을 바탕으로 앞으로 도래할 이야기들을 능동적으로 엮어가는 미래지향성에서 아카이브의 의미와 본질을 찾고 있다는 점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번 컨퍼런스를 주최한 니모스케이프(Mnemoscape) 는 엘리사 아다미(Elisa Adami)와 알레산드라 페리니(Alessandra Ferrini)로 이루어진 두 명의 콜렉티브로, 현재 기억, 역사, 아카이브 충동(archival impulse )을 주제로 하는 온라인 리서치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 홈페이지(archivesforthefuture.wordpress.com)에서는 관련 에세이나 인터뷰, 이벤트 소식을 접할 수 있다. 올 하반기부터 니모스케이프는 웹진 형태로 전환하여 정기적으로 아카이브 관련 전문학술지를 발행할 예정이다. 참고로 본 컨퍼런스는 웨스트민스터 대학, 근현대문화연구소(Institute for Modern and Contemporary Culture), 그리고 국제시각문화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Visual Culture)의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좌)컨퍼런스 전경 우)컨퍼런스 포스터 이미지
[사진제공] 니모스케이프(Mnemoscape)
지가은
글. 지가은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현대미술이론(Contemporary Art Theory)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동대학원에서 비주얼컬처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다. 현재 월간미술의 런던통신원, 온라인 큐레이토리얼 리서치 플랫폼 미팅룸(meetingroom)의 아카이브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
미팅룸 홈페이지 http://www.meetingro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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