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의 안정희씨
아침에 등교하는 아이가 예뻐 사진을 찍었다. 지하철로 학교를 오가다 읽은 책이 마음에 들어 블로그에 간단한 독후감을 남겼다. 이것은 개인의 일상에 대한 간략한 기록이지만, 언젠가 공동체를 위한 중요한 아카이브가 될지도 모른다.
<기록이 상처를 위로한다>(이야기나무)는 ‘소소하지만 중요한 기록’인 보통 사람들의 생활 아카이브(archive)가 가진 의미를 말하는 책이다. 통상 아카이브란 정부 기록 혹은 공문서를 의미했지만, 요즘은 기록 혹은 ‘기록물을 보관하는 장소’의 뜻으로 확대돼 사용되고 있다.
저자 안정희씨(46)는 2012년 기획교육 상임이사로 일하던 느티나무 도서관에서 아카이브 강좌를 기획한 뒤 그 중요성에 눈떴다. 어느덧 십수년의 역사를 지닌 한국의 시민단체 관계자들도 자신들이 생산해낸 기록물의 활용법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다. 아카이브는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공공 기록물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지만, 민간 아카이브 역시 소중하다는 점을 강좌를 통해 깨달았다.
팔만대장경,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를 보면 알 수 있듯 한국의 기록문화는 유구하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거치며 소중한 전통이 파괴됐다.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느라, 그 순간들을 기록하자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안정희씨는 아카이브를 화석에 비유한다. 지층에 묻힌 화석을 통해 고대 생태계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듯, 오늘의 아카이브를 구축함으로써 문화를 전승할 수 있다.
그는 “세월호 참사 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이 민간 차원의 기록 자원 봉사자들이었다”고 말했다. 망각의 강 너머로 사라질지 모르는 그날의 슬픔을 붙잡아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기록의 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교 일상을 찍었다가 사진집으로 묶어낸 여학생, 갑자기 세상을 떠난 오빠를 일기로 추억하는 여동생, 집필이 어려운 할머니들 이야기의 구술 채록 등은 ‘이야기 본능’을 가진 인간의 역량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민간 아카이브 구축이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보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기록하고 보관하고 분류하고 삭제하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반추하고 앞으로 살아갈 길을 찾기” 때문이다.
물론 주의할 점도 있다. 민간단체에서 아카이브를 구축할 때는 ‘해석의 문제’에 마주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시점과 과거 기록할 당시의 시점이 다르다. 기록을 많이 남긴 사람의 목소리는 반영되지만, 남기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도로 건설 기간, 경제적 효과 등의 기록은 남아 있지만, 건설에 참여한 노동자의 목소리는 남아 있지 않다. 이 때문에 가능하면 많은 이들의 의견을 취합하고, 필요하면 기밀 연한도 정해야 한다. 디지털 장비의 발달과 함께 기록은 그 어느 때보다 수월해졌다. 하지만 무조건 모은다고 아카이브가 되지는 않는다. 선택 혹은 폐기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기록은 아카이브가 아니라 데이터 덩어리일 뿐이다. 안정희씨는 사진 분류를 예로 들어 아카이브 구축 방법을 설명했다. 일정 시기마다 사진을 연도, 장소, 주제 등으로 분류해 그 가치를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다 보면 가치 없는 자료는 저절로 탈락한다. 이 과정에서 사진에 찍힌 사람의 삶이 지니는 소중함을 되묻게 된다. 여러 사진 중 하나를 선택하다 보면 사진에 사회적 맥락을 넣고 싶은 생각이 든다. 바로 그때가 민간 아카이브가 공공성을 획득하는 순간이다.
<백승찬 기자>
- 경향신문 201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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