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9-22 15:41
옛 포스터는 타임머신, 낡은 술병은 시간여행의 벗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762197.html [474]

(사진1: 부여의 복합생활문화공간 백제원 제1전시장 일부)
(사진2: 백제원에 있는, 이산가족찾기에 쓰였던 대자보)
(사진3: 파주 헤이리 근현대사박물관에 재현해놓은 옛 도심 골목길 일부)
(사진4: 파주 근현대사박물관에 전시된 1970년대 선거 벽보)
(사진5: 백제원에 전시된, 1970년대 혼분식에 관한 담화문)


[esc]커버스토리
근현대 생활유물 전시하는, 대표적 생활사박물관 둘러보니


근현대 생활유물들은 지방자치단체나 대학의 박물관에서도 일부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생활유물만 집중적으로 모아놓은 사설 생활사박물관을 찾으면 좀더 생생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 수도권 나들이길, 지역 여행길에 들러 살펴볼 만한 대표적인 근현대 생활사박물관(전시관) 2곳을 찾아갔다. 생활유물 보관창고를 방불케 하는 충남 부여군 백제원과, 옛 골목길까지 재현해 생활유물을 전시한 경기 파주시 헤이리 한국근현대사박물관이다. 식물원·토기전시관·19금전시관까지 갖춘 백제원이 자질구레하면서도 흥미진진한 만물상 분위기라면, 한국근현대사박물관은 옛 골목들에 가옥·가게·교실 등을 실감나게 재현해 후줄근하고도 정겨운 ‘달동네’의 느낌이 난다. 추억 속으로 이끄는 볼거리가 빼곡하기는 마찬가지다.


부여 백제원

얼핏 보기에 잡동사니도 이런 잡동사니가 없다 싶다. 입구부터 내부 이동로 좌우 옛 상점 유리문 안팎은 물론, 손 닿는 곳 발 닿는 곳, 지붕 위와 천장까지 오만가지 생활유물이 겹겹이 쌓여 있다. 나름 테마별로 전시해놓은 모습이지만, 일부 잡동사니들은 진열돼 있다기보다 내던져져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생활유물에 별 관심 없는 이라면, 머리 아파하며 그냥 돌아 나올 성싶은 풍경이다.

“그게 백제원의 특징이자 불가피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새 전시관 짓는 건 엄두가 안 나, 많은 물건들을 좁은 공간에 배치하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백제원 이건배 해설사) 백제원은 최규원(60) 원장이 30년 가까이 모은 근현대 생활용품들을 보관·전시하려고 2009년 조성한 ‘복합생활문화전시공간’이다.

만물상·옛 성인잡지 궁금하다면
부여 ‘백제원’이 제격
달동네 옛골목이 그립다면
파주 ‘한국근현대사박물관’으로

잡동사니 보관창고 같아도, 찬찬히 살펴보는 동안 감동이 밀려온다. 입구는 소박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둘러보면 ‘대박’이란 느낌이 든다. ‘새마을노래’, ‘꿈꾸는 백마강’ 등 노래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1960~70년대 박정희·김종필 담화문이 내걸린 비디오가게·문방구·만화방·전파상·성냥가게·대포집 등을 둘러보게 된다. 2층의 영화 관련 자료들이 압권이다. 영화 대본 상자들, 두루말이 포스터들, 필름 뭉치와 영사기 등 장비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다. 혼식·분식 장려 담화문, 자장면 가격이 150원인 중국집 협정가격표, 1장짜리 옛 국회의원 달력들과 ‘입어보면 다시 찾는 고급 메리야쓰’ 달력, ‘이산가족 찾기’에 사용하던 대자보도 흥미롭다. 화려하면서도 촌스러운 옷차림을 한 1960~80년대 연예인들의 다양한 표정도 만날 수 있다.

잡다하게 쌓인 물건들만큼이나 둘러보는 동선도 복잡하다. 1·2층이 트인 2층 건물(제1전시실)의 1층 입구로 들어서서 좁은 통로를 따라 먼저 2층으로 오른다. 한 바퀴 돌아 1층으로 내려오면, 밖으로 이어진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거대한 비닐집 안의 식물원을 둘러보게 된다. 비닐집에서 나오면 동선은 다시 야외정원을 거쳐 비누·공예체험 공방과 삼한·백제시대 토기류 전시공간(누드수장고: 수장고 내부를 유리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게 한 곳), 100년 전 충남 지역 사진 전시장이 있는 제2전시실로 이어진다. 제2전시실 2층엔 조선·일본의 적나라한 ‘춘화’와 크고 작은 남근목들, 1960~70년대 대중잡지류·국내외 성인잡지·성교육 자료 등을 전시한 ‘19금 박물관’도 있다.

식물원은 궁남지·백마강 등을 형상화한 정원과 기와원·옹기원·사군자원·고란초원 등으로 꾸며져, 둘러보면서 백제역사·유물·설화와 식물·조경 등까지 공부할 수 있다. ‘19금 박물관’은 간혹 학생들이 몰래 들어가는 경우가 있어 문을 잠가두지만, 성인들이 관람을 원하면 곧바로 열어준다.

백제원의 ‘꿈꾸는 백마강’은 음악 관련 용품들이 빼곡하게 전시된 음악 카페다. 1930년대부터 70~80년대까지 발매된 1만여장의 국내외 엘피(LP) 레코드판과 200여점의 악기, 100여점의 음향기기류와 자료가 카페를 메우고 있다. 선반에 꽂힌 각종 노래책만 1500권에 이른다. 백제원엔 한정식을 내는 식당 ‘백제궁 수랏간’도 딸려 있다.


파주 한국근현대사박물관

어둑한 돌계단 골목을 내려가 인쇄소 앞 ‘재건 국민운동 촉진회’와 담배가게·복덕방 옆 담벼락 앞에 선다. 박정희·김영삼·김대중 대통령 선거 포스터가 자연스럽다. 약방 지나 언덕 위로 오르면, 구불구불 비좁은 골목길은 철공소와 국밥집 앞으로 해서 학교 앞 문방구와 붕어빵 노점으로 이어진다. 이발소 거쳐 옥상에서 젊은 어머니 한 분이 빨래를 널고 계신 삼표연탄 가게 앞 돌계단을 오르면, 골목길은 작은 시멘트 부뚜막에 솥단지가 걸린 문간방을 지나, 찌든 나무발판 사이에 누런 똥이 수북이 쌓인 변소를 통과하게 된다.

지하 1층, 지상 1·2층을 튼 건물에 조성한 주택, 상점·노점·교실 안팎과 골목에 빼곡히 진열된 상품·도구·기계들은 모두 수십년 전 실제 사용됐던 것들이다. 아련한 추억에 잠겨 골목길을 걷다 보면, 시간을 거슬러 실제로 과거의 한 공간에 머물러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고종 황제로부터 김구·이승만을 거쳐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치 100년사 사료’도 흥미롭다.


헤이리의 한국근현대사박물관은 전국 생활사박물관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체계적으로 전시·조성한 박물관으로 꼽힌다. 2005년 파주 운정지구에서 국내 첫 생활사박물관으로 문을 연 뒤 2010년 헤이리로 옮겨와 현재는 헤이리 예술인마을의 대표적 명소로 자리잡았다. 고교 시절부터 시작해 평생을 생활유물 수집에 바쳐온 최봉권(61)씨가 모아들인 근현대 생활용품 8만여점 가운데 7만여점을 전시해놓았다.

최씨는 “기존 박물관 전시물들이 각 시대 상위 1%에 속하는 이들의 유물이라면, 여기 모아놓은 것들은 근현대 99%에 속한 일반서민들이 써온 생활용품”이라며 “찌그러진 주전자, 낡은 상표 붙은 술병 하나하나가 서민들 애환이 담긴 소중한 유물”이라고 말했다.



- 한겨례신문. 이병학 선임기자. 2016.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