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보가 폭주하고 속성으로 소비되는 디지털 시대. 그 신속함과 변질 없는 매끈함은 현대인을 매료시킵니다. 그러나 지나간 시대의 LP 레코드와 놀이판이, 납 활자와 타이프라이터가 전해 주던 장인의 체취와 사물의 감촉을 디지털은 담아내지 못합니다. 새 연재 ‘물성예찬(物性禮讚)’이 아날로그 시대의 매체와 물건에 깃든 향기를, 그 아름다움과 풍요함에 매혹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
독일 전역의 벼룩시장을 순례하며 인연을 맺은 ‘가족들’로 가득한 서재에서 6000원 주고 산 그룬디히 진공관 라디오를 마치 아기처럼 품에 안고 있는 민병일 씨. “독일에 있을 때는 금요일만 되면 소풍 전날 초등학생처럼 얼마나 설렜는지 몰라요. 녀석들을 담아올 배낭에 간식으로 먹을 사과와 샌드위치를 챙겨 넣으며 마냥 행복했는데….”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1950년대 독일에서 생산된 진공관 라디오라고 했다. 딸깍, 켜니 FM의 클래식 선율이 흘러나왔다. 믿을 수 없이 소리가 영롱하면서도 울림이 깊었다. 얼마 주었느냐고 물었다. 살 때 가격이 5마르크, 6000원 정도란다.
그가 혼자 사는 서울 마포구 서교동 방 세 칸짜리 아파트는 그런 물건들로 가득하다. 주로 독일에서 벼룩시장을 순례하며 산 물건에 대한 찬사를 엮어 지난해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이란 책으로 펴낸 민병일 씨(53)의 ‘가족들’이다.
“1997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2003년까지 만 6년간 산 것들입니다. 대부분 5마르크 이하였고, 가장 비쌌던 게 1970, 80년대 탄노이 스피커였지만 50만 원이 채 안 들었습니다. 귀국할 때 컨테이너 하나를 통째로 빌려야 했죠.”
책과 LP음반이 가장 많지만 몽당연필부터 만년필, 편지 개봉 나이프, 촛대, 찻주전자, 무쇠 다리미, 접이식 의자 등 없는 게 없었다. 골동품이라고 부르기엔 사소하고, 잡동사니로 치부하기엔 고졸한 맛이 넘치는 물건들이다.
시인이자 출판사 편집주간으로 일하던 그는 30대 후반에 훌쩍 독일 유학을 떠났다. 예술에 대한 동경을 학문적 탐구로 완성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어학연수부터 시작해야 하는 힘든 선택이었다. 외로움을 달래준 게 도시마다 주말이면 열리는 벼룩시장이었다. “엄청난 시간의 무게를 간직한 물건들이 싼값에 넘쳐나는 거예요. 주말이면 배낭을 메고 벼룩시장 순례에 나섰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요.”
고르고 골라 사온 물건들을 창가에 진열하고 ‘진짜 대화’를 나누며 외로움을 치유했다. 방 곳곳의 ‘보물’에 습기가 차지 않을까 구입한 습도계에게는 학교에 갔다 와 “오늘 하루 잘 있었니? 야, 너 습도 많이 먹었구나. 촉촉하겠네”라고 말을 건넸다.
“독일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녹아 있는 물건들을 친구 내지 가족으로 여기면서 좋은 주인을 새로 찾아주는 데서 행복을 얻습니다. 그러니 가격에 구애받지 않아요. 그들이 교환하는 것은 물건에 깃든 추억이고 심미성이지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 물건 하나하나에 얽힌 사람들의 사연을 그는 다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책이든 권당 5마르크에 넘겨준 ‘페르시아 아저씨’, 마리아 칼라스의 희귀 LP판을 넘겨주며 집으로 초대한 사내, 오랜 손때가 묻은 몽당연필을 팔러 나온 할머니….
“디지털 기기가 ‘시간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면 아날로그 시대의 사물은 ‘시간의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장인의 비범한 솜씨가 담겨 있고, 수많은 이의 추억과 향수가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체의 생명력을 갖는 거죠.”
그는 오래된 예술품을 선점하려는 수집광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래된 사물에 깃든 인류문화의 순환과정에 참여한 순례자일 뿐이며,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 수많은 가족을 입양 보냈다고 수줍게 고백했다.
“독일은 나라는 부자일지 몰라도 개인은 검소합니다. 반면 한국은 개인이 부자여야 직성이 풀려요. 뭐든 최신으로 바꿔야 하고, 주말마다 외식이다 여행이다 돈 쓰는 일에만 관심이 있지, 삶을 진짜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일상의 가치를 공유할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런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그는 3, 4년째 전국을 돌아다니며 알루미늄 새시가 없는 오래된 창문의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마음의 은유’로서의 사물을 고국에선 찾기 힘들어 그 마음의 창을 찾는 심정으로.
- 동아일보 20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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