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고서 수집·공부하다 보니
고조선 사료 적지않음 느껴
日·中 역사왜곡 막을 연구 힘써야
취미 넘어 이젠 역사적 사명감
고서에 해제 달고 문고 운영
일반 연구자에게도 열람 허용
국립 책 박물관 만들고
국제적 규모 출판사도 육성
춘향전 등 세계에 알렸으면
1982년 화봉문고가 20주년 행사로 소위 '북 페어'를 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전시의 일환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개념 자체가 없던 때였다. 행사가 진행되자 출판업계와 외국도서 수입업자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책을 정가보다 30% 가까이 싸게 팔았기 때문이다. 경쟁 서점에서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하고 출판협회에도 고발할 정도였다. '북 페어'는 결국 여승구(77ㆍ사진) 화봉문고 대표에게 충분한 수익을 주었지만 무엇보다 그를 30여년 동안 무려 10만권의 고서(古書)를 모은 국내 몇 안 되는 수집가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는 "사학자들이 자꾸 고조선ㆍ단군 관련 사료가 적다고 하지만 관련 자료가 많다. 일본이나 중국 학계가 우리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시도에 휘둘리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1976년에는 '월간 독서'를 창간해 독서대상ㆍ독서문학상ㆍ문화세미나를 진행했는데 그 즈음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됐어요. 허무하기도 하고 뭔가 새로운 걸 하려던 찰나에 일본ㆍ대만 여행에서 '북 페어' 아이디어를 얻었죠."
당시 화봉문고의 핵심사업 중 하나가 해외서적 수입ㆍ판매였다. 통상 도매로 20% 정도 싸게 사서 이문을 남기는 구조였는데 당시 도매시장을 과점하던 일본 출판 담당자가 이런 제의를 했다. 일반 도매에서는 20% 이상 할인하기 어렵지만 '북 페어'를 위한 주문에는 55%까지 할인해줄 수 있다는 얘기였다.
여 대표는 이거다 싶었고 바로 20주년 기념 핵심행사가 됐다. 출판ㆍ간행물에 대한 검열이 심하던 시절이라 1년여 어렵게 준비해 행사 1주일 전 기자회견을 가졌다. 국내 도매가보다 싼 30% 할인가에 도서를 판매한다고 하니 언론에 말 그대로 '대서특필' 됐다. 광고도 세게 냈다. 영국까지 다녀오며 공을 들여 확보한, 영국 전 모리스 해럴드 맥밀런 총리의 친필 축하편지까지 얹었다.
말 그대로 성황이었다. 하지만 경쟁사가 공정위에 고발했다. 영국 총리의 편지는 가짜고 책을 이렇게 싸게 파는 건 유통질서 교란이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유통업계는 1년에 네 번 1주일 내에서만 바겐세일이 가능하다는 규정이 금과옥조처럼 지켜지던 때였다. 당시 을유문화사 안춘근 주필이 전세계 북 페어의 사례를 조목조목 정리해 이를 반박하고 편지가 진본임이 확인되고 나서야 겨우 정리가 됐다.
그러자 이번에는 같은 곳에서 대한출판문화협회 사회정화위원회로 또 고발을 접수시켰다. 서적 유통시장의 질서를 무너뜨렸다는 똑같은 이유에서다. 여 대표는 "회의에 나오라고 하길래 당당히 따졌다. 우리는 모든 출판사에 참여 요청을 했고 싸게 산 책을 소비자에게 싸게 파는 것이 왜 잘못인지 따졌다. 더구나 한 달 한정으로 진행하는 행사가 아니냐고. 그렇게 또 넘어갔다"며 웃었다.
백과사전이나 전집류가 주력이던 출판사도 난리가 났다. 보통 영업사원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팔았고 일부에서는 실적 올리기에 급급한 영업사원이 제 돈으로 사들였다 헌 책방에 헐값에 싸게 내놓은 새 물건이 많았다. 화봉문고는 이를 정가의 10~30% 정도 가격에 사들였고 거의 이문 없이 내놓고 팔았다. 그러니 곡소리가 안 날 수가 없었다. 사회정화위원회에 가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또 외서 수입 업계에서도 들고 일어났다. 화봉문고가 꿈쩍하지 않으니 일본 출판을 압박해 거래선을 끊어놓았다. 여 대표는 질세라 일본 오사카로 가 새로운 도매상과 거래를 시작했고 3년여를 그렇게 견디니 일본 출판이 다시 공급하겠다고 돌아왔다.
북 페어는 이후로도 7~8회까지 이어지다 서점 사업을 접으면서 끝이 났다. 하지만 여 대표에게 고서에 대한 취미를 남겼다. 당시 을유문화사의 주필로 오래 있었던 안충근씨가 그를 이끌었다. 북 페어 첫해에 한 소장가가 고서 수백권을 북페어에서 경매로 팔고 싶다며 찾아왔다. 우선 급하게 전시를 치른 후 언론사 문화부장들과 뒤풀이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좋은 수집품을 흩어버릴 것이 아니라 화봉문고에서 박물관이라도 하나 운영하면 어떻겠냐는 얘기였다. 여기에 여 대표가 무릎을 쳤다.
그는 이미 서울시내 사립대학에서 들어온 제의도 물리치고 직접 사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후가 문제였다. 15년여 고서에 빠져 있으니 회사 경영에 소홀해지고 당연히 어려워졌다. 사업에 쓰일 돈이 고서 구입으로 뭉텅뭉텅 잘려 들어가니 영업이 잘 될 리가 없다. 수익이 적자로 돌아섰고 은행 부채도 늘어났다.
그때 '지옥 같은' IMF가 왔다. 지옥이었다. 수출업자들이야 환호했겠지만 수입업자에게는 지옥이다. 결국 빚을 갚기 위해 보유하던 부동산도 처분했다. 한참 사업이 좋을 때 현재 영풍문고 인근에 마련했던 사옥 부지가 있었다. 여러 필지를 사들이면서 대출을 많이 끌어들였지만 부동산 감정가가 채 나오기도 전에 이자 정도 수준은 우습게 오르던 시절의 부동산이었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과 마련한 번듯한 건물이 결국 고서에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 대표는 고서 수집에 대해 취미를 넘어 이제 사명감까지 느낀다고 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 왜곡된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있다. 당시 일본이 스스로의 역사적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우리 역사의 시작시점을 고조선이 아닌 삼국시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본 역사시대와 비슷한 수준으로 맞췄다는 얘기다.
"사학계에서는 자꾸 사료가 적다지만 고조선ㆍ단군 관련 자료가 많습니다. 일본이나 중국 학계가 우리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시도에 휘둘리면 안 됩니다. 고조선 관련 연구자가 대체로 재야 사학자들이라 체계적인 면에서는 밀리지만 우리 정서ㆍ민족정신은 무엇보다 '홍익인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쨌든 회사와 부동산까지 정리하며 마련한 이 수집품들이 금전적인 가치는 충분히 담보하고 있을까. 여 대표도 항상 그게 고민이다. 사료로서 가치가 뛰어나도 환금성이 떨어지는 것도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0여년 전 권당 20만원에 산 활자본의 경우 현재 3만원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다. 인플레이션과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여 대표는 "예나 지금이나 사료는 싸지만 골동품은 비쌌다. 초기에는 사료만 샀지만 수집을 하다 보니 골동품의 가치를 알게 됐다. 이제는 반반 정도의 비중으로 진행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역사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가 맞으면 좋지만 늘 그렇지 않다. 하지만 기업이 이윤을 내서 세금도 내고 고용도 창출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면 기업가로서는 '유죄' 아닌가. 여기도 트렌드가 있어 이를 널리 내다보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물론 판단력만으로는 부족하고 운이 따라야 한다. 돈 버는 사람 따로 있다"며 웃었다.
수집한 고서에는 그가 일일이 해제를 단다. "다들 사진으로만 보고 제각기 다른 해석을 한다. 일일이 손으로 만져가며 고민해야 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하다 못해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서지학 전공 큐레이터가 없는 실정"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는 2008년에는 모란갤리리를 인수해 화봉갤러리로 새롭게 개관했다. 2013년부터는 수천 점의 미술품을 체계적으로 관리ㆍ전시ㆍ대여ㆍ유통하는 화봉미술은행 업무도 시작했다. 특히 1만여점의 고서를 모아 일반 연구자들에게 열람을 허용하는 화봉서지학문고도 운용하고 있다.
여 대표는 우리 문화 중 금속활자가 최고라고 강조했다. 물론 아직 세계적으로는, 그리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를 자랑스러워하는 독일에서는 그저 '도장' 수준으로 폄하하고 있다. "고려청자나 석굴암 같은 것으로 동양적인 무엇을 인정받기는 쉽겠지만 그걸로 세계 최고 소리를 들을 수 있겠나. 고서를 모으며 계속 공부하다 보니 우리 금속활자가 소위 '메탈타입 로드'를 거쳐 유럽에 넘어간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립 책 박물관을 만들고 그걸 한국의 브랜드로 삼아야 한다. 10여년 동안 이것을 주장했지만 정부에서는 아직도 반응이 없다. 나아가 우리 문헌을 알리고 홍보할 국제적인 규모의 출판사도 육성해야 한다. 일본의 고단샤 인터내셔널을 보면 안다. 일본 역사와 예술을 누구나 갖고 싶을 만한 수준의 화보로 세계에 내놓지 않나. 춘향전 같은 불멸의 고전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터뷰를 마치며 그렇게 모은 수집품 중 가장 아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망설임 없이 시집 3권을 꼽는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한용운의 '님의 침묵',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각각의 초판본이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그가 웃으며 덧붙인다. "중학교 때 시를 썼습니다. 광주 서중학교 교내 공모전에서 시 부문 3등을 하면서 등단했죠. 요새야 워낙 다양한 문예지와 신춘문예 등이 있지만 당시에는 드물어서 회보나 교보 공모전에서 선정되면 바로 등단하는 셈이었습니다." 아직도 그에게서 문청(文靑)의 냄새가 났다.
He is…
▲1936년 광주시 ▲1959년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중퇴 ▲1994년 고려대 국제대학원 최고과정 수료 ▲1963년 화봉문고 대표이사 취임 ▲1976년 월간 독서 발행 ▲1979~1982년 한국도서관협회 이사 ▲1983~1987년 한국출판학회 부회장 ▲1987~2000년 한국고서협회 부회장ㆍ회장ㆍ명예회장 ▲1988~1994년 무등장학재단 이사 ▲2000~2002년 한국고전문화진흥회 회장 ▲2004년 화봉책박물관 관장 취임 ▲2008년 화봉갤러리 관장 취임
고서와 함께 5,000년 역사의 숨결 느껴보세요
단군·고활자·무속사상 등 주제로
8월까지 화봉문고 50주년 전시
"이번 50주년 전시회에서 우리 역사 5,000년을 모두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여승구 화봉문고 대표는 자신만만했다. 이번 전시회는 화봉문고의 지난 32년을 증명하는 동시에 책과 함께 걸어온 50년 역사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자리다. 지난 3월 '책으로 보는 단군오천년'전, 4월에는 '한국의 고활자'전, 이달에는 '한국 문학작품 산책'전을 진행하고 있다. 이후로도 6월 '한국 교과서의 역사', 7월 '고문서 이야기', 8월 '무속사상, 그리고 불경ㆍ성경ㆍ도교ㆍ동학 자료' 전시회가 8월까지 매달 열린다.
특히 3월 전시에는 태조가 개국공신들에게 내린 좌명공신녹권과 정조대왕 문집의 핵심만 골라 편찬한 어정제권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는 등 총 271종 491점의 고서 및 유물이 전시됐다. 특히 '눈으로 보는 화봉문고 50년'을 주제로 한 물품도 함께 선보였다. 4월 '한국의 고활자'전에는 한국 출판문화의 우수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국의 고활자본을 한자리에 모았다. 여러 종류의 금속활자(230여종), 중앙과 지방ㆍ민간에서 쓰였던 다양한 크기의 목활자(120여종), 우리 고유의 한글로 만든 한글활자(60여종) 등을 전시했다. 현재는 한국 최초의 국한문혼용 기행문인 '서유견문'과 기념비적인 신문학 소설들의 초판본을 선보이는 '한국 문학작품 산책'전이 진행되고 있다. 다음달 '한국 교과서의 역사' 전시에는 조선 최초의 교과서 동몽선습과 명심보감 초간본 등이, 7월 '고문서 이야기' 전시에서는 1401년 태종이 내린 '좌명공신녹권' 등의 고문서를 접할 수 있다. 마지막 8월 '무속사상…' 전시에서는 당사주 70여책과 무속도구ㆍ무속화 등이 전시된다.
- 서울경제 201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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