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창 기자
“고려·조선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손으로 베끼거나(필사) 목판으로 책을 찍어냈던 아날로그 시대에 디지털 발상을 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금속활자를 사용하면 인판을 만들어 찍고 금방 해체해서 다시 다른 인판을 조립하는 방식으로 책을 찍어낼 수 있었으니까요. 삼성전자의 반도체가 오늘날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것도 다 유래가 있습니다.”
국내의 대표적인 고서수집가인 여승구(77) ㈜화봉문고 사장은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문화의 예찬론자다. 지난 5월 28일 10만 권이 넘는 장서를 자랑하는 그의 서울 성북구 성북동 사무실을 찾았을 때 주저없이 대표 컬렉션으로 든 것도 고활자 인쇄본들이었다.
여 사장은 15세기 중반 서구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를 시작하기 이전 국내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수백 권을 비롯, 7000여 권 이상의 고활자 인쇄본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하지만 여 사장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한국의 고활자 인쇄문화가 세계에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점을 아쉬워했다. 1960∼1990년대 외국 서적 및 신문·잡지 등을 주로 수입했던 그는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사업차 들를 때마다 인근 마인츠의 구텐베르크박물관을 찾곤 했는데, 당시 패널에 한국의 금속활자를 쇠도장 형식이라고 표현한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물론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프랑스대혁명, 영국의 산업혁명 등 서구 역사에 끼친 영향력과 비교하면 우리 금속활자 인쇄술의 영향력은 미미하지만 말이다.
올해로 화봉문고 창립 50주년, 고서수집 32년째를 맞은 여 사장은 지난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 동안 서울 종로구 관훈동 화봉갤러리에서 매달 주제를 바꿔 진행하고 있는 기념 전시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전남 담양에서 13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광주서중과 광주고를 졸업하고 1955년 서울에 올라온 그는 재수 기간 동안 친척이 경영하던 고서점 광명서림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책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 중앙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지만 가족의 생계를 돌봐야 했던 여 사장은 고서점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학업과 병행했다.
7년여 고서점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해 1963년 화봉문고의 전신인 팬아메리칸 써비스를 창립한 그는 브리태니커백과사전과 외국 학술잡지 수입대행 등의 사업을 시작했다. 화봉(華峰)은 그의 고향 동네 뒷산 이름인 화봉(火峰)에서 따온 것이다. 물론 ‘불 화(火)’자는 ‘빛날 화(華)’자로 바꿨다.
―고서수집가가 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1982년에 창립 20주년 기념행사로 ‘서울북페어’를 기획했어요.(여 사장은 원래 1983년이 창립 20주년인데 착오로 이때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때 마침 한 사람이 저를 찾아와 문학책이 많은데 전시장에 놓고 좀 팔아달라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나한테 넘기라고 하고 북페어 기간 중 ‘한국문학작품 초판본 전시회’란 기획전을 꾸몄지요. 북페어 끝나고 책들을 경매에 내놓았는데 입찰 하루 전날 저녁 일간지 문화부장단 모임에 갔다가 ‘문학박물관이나 하나 만들어 보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원래 제가 중학교 때 시인 지망생이어서 문학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던 차에 다음날 대학도서관의 입찰도 유찰시켜버리고 고서 컬렉터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문학 외에도 고활자 인쇄본, 고지도, 종교서적, 교과서, 영화 시나리오 등 컬렉션 구성이 다양합니다.
“고서수집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라서 처음에는 을유문화사 주간을 지낸 서지학자 고 안춘근(1926∼1993)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배웠어요. 원래는 문학서만 수집하려 했는데 점점 범위가 넓어졌지요. 세계에 내놓을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가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고활자 인쇄본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우리 인쇄문화는 서구처럼 일반 백성을 계몽하는 데 사용된 게 아니라 소수 엘리트 계층에 독점돼 통치의 수단으로 쓰인 게 아쉽기는 하지만요. 어쨌든 고활자 인쇄본을 계기로 역사적 사명감 같은 것을 느끼고 모은 게 지금의 컬렉션입니다. 외국 서적 수입해 번 돈과 제 일생을 고서수집에 바쳤는데 사실 저도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수집이라는 게 한번 빠지면 그렇게 돼버리고 맙니다.”
―고활자 인쇄본 외에 아끼는 컬렉션이 있습니까.
“‘춘향전’ 관련 자료를 600점 정도 갖고 있습니다. 각종 판본과 회화부터 시작해 시청각 교재까지 모든 형태의 춘향전을 갖고 있지요. 지금 한류는 특정 배우나 가수 등에 대한 의존도가 큰데, 저는 한류가 지속되려면 예술작품을 가지고 세계에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점에서 춘향전은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는 작품입니다. 작곡가인 고 윤이상(1917∼1995)이 뮌헨올림픽 개막 축전에 오페라 ‘심청’을 초연했는데, 사실 자기 목숨을 바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다는 심청전의 스토리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잘 와 닿지 못하는 주제예요. 반면 춘향전은 판소리·무용·오페라 등 여러 장르로 변주돼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동안 ‘국립책박물관’ 건립을 주장해 오셨습니다.
“사실 제 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책을 수집해 왔습니다. 고서수집에 몰두하느라 사업에 신경을 못 쓰다 보니 경영이 어려워졌지만 그래도 책은 팔 수 없어 개인과 법인 빌딩 등 부동산을 팔았지요. 앞으로가 문제인데 사는 데까지는 전력투구를 했지만 지금처럼 책박물관 형태로 유지하는 것은 제 재력으로는 힘들 것 같아요. 참여정부 시절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을 만나 ‘국립책박물관을 만들면 제 장서를 모두 기증하겠다’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현재 있는 박물관도 법인화 얘기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또 다른 국립박물관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잘 알지요. 하지만 지금도 저는 책이 도서관에 들어가면 정물(靜物)이 되고 만다는 생각에 금속활자 등 우리 조상들의 위대한 유산을 알리는 국립책박물관 하나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 소장품을 팔게 될 경우라도 한 분야 또는 전체를 일괄로 넘겼으면 넘겼지 절대 돈 되는 것만 따로 빼내 팔지는 않을 생각이에요.”
여 사장은 책과 인연을 맺은 지 60주년이 되는 오는 2015년 “‘책과 60년’(가제)이라는 제목으로 회고록을 펴내거나 그동안 써둔 잡글을 모은 책을 출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문화일보 2013.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