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9-01 10:16
폐교에 핀 '잡지 왕국' 회사가 온통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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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회사 구경하기] (2) 창사 40주년 디자인하우스

1층 로비선 백남준 자화상 마주하고, 천장엔 설치미술도
교실·복도 허물어 한 공간으로… "학교로 출근하는 기분"

족발집 많기로 유명한 서울 장충동엔 일명 '잡지 왕국'으로 불리는 기업이 있다. 폐교된 고등학교를 리모델링해 독특한 풍모를 자랑하는 '디자인하우스'다. 1층 로비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Self portrait'가 버티고 있다. 직원들은 출퇴근하는 아침저녁 백남준의 자화상(自畵像)을 마주한다. 디자인하우스 정신을 '세뇌'하려는 오너의 전략이기도 하다. "심미안이란 좋은 작품들 속에 파묻혀 살아야 체화(體化)되니까요. 우리는 예술을 다루는 사람들이란 정체성을 심어주려고 '자화상'을 두었습니다."(이영혜 대표)

1976년 국내 최초 디자인 전문지 '월간 디자인'으로 출발한 디자인하우스는 40년간 '행복이 가득한 집' '럭셔리' '맨즈 헬스(Men's Health)' 등 잡지 8종을 창간했다. 단어 하나, 사진 한 장에 목숨 걸고 사는 잡지쟁이들이 우글거리는 회사라 이채로운 공간이 많다. 로비 왼쪽, 66㎡(약 20평) 남짓한 1층 회의실 이름은 '모이소(募耳所)'. 모여서(募) 귀 기울여 듣는(耳) 공간(所)이란 뜻이다. 통유리로 둘러싸인 이곳 벽엔 디자인하우스가 반세기 가까이 출판한 잡지들이 연도별로 꽂혀 있다. 회사로 찾아온 취재원을 만나거나 사원들끼리 자유롭게 대화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지난 17일 이곳을 방문했을 땐 '제8회 불교문화 상품 공모전' 심사가 한창이었다. 템플스테이와 사찰 음식을 주제로 한 디자인 문화 상품들이 줄지어 심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의실 안쪽 유리문 하나를 지나면 도서관 '차지소(차知所)'가 나온다. '찾다'는 뜻의 앞글자 '차'와 지식을 뜻하는 한자 '지(知)'를 붙인 합성어다. 벽면엔 전 세계 유명 잡지 신간들이 비치돼 있고, 각종 고전(古典)과 베스트셀러도 구비돼 있다. 차지소 곳곳을 장식한 미술품이 눈길을 끌었다. 모이소와 차지소의 경계가 되는 유리문 옆엔 스페인 부자(父子) 디자이너 토니 셀레스와 브루노 셀레스가 설립한 바사바(Vasava) 스튜디오의 작품 '핑크맨'이 있다. 디자인하우스가 주최한 '서울디자인페어'에 출품했다 기증하고 떠난 작품이다. 세 개의 창문 사이사이 걸린 그림 두 점은 재작년 2월 명품 까르띠에(Cartier)가 전시한 배우 하정우의 작품. 전시회 시작과 동시에 판매가 끝났다는 1000만원대 작품 중 두 점이 이곳에 있다. 천장엔 설치미술가 최정화의 작품 '풍선'이 걸렸다.

디자인하우스가 미술관 같은 공간이 된 건 이영혜 대표 때문이다. 그는 신진 작가들 작품을 즐겨 구매하기로 유명하다. "신인 시절 작품 가치를 인정받고 제값에 팔아본 경험이 향후 활동에 큰 자산이 되니까요. 처음 작품이 팔렸을 때 작가들이 활짝 미소 짓는 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릅니다." 이곳을 장식한 미술품 대부분도 업계에서 인정받는 신인(信人)이 신인(新人) 시절 작업한 초기 작품들이다.

이 대표는 "잡지사 운영을 영리(營利)보다 문화사업으로 인식한다"고 했다. '직업으로서의 문화인'은 디자인하우스 전(全) 사원이 공유하는 직업 철학! 마이웨딩 이덕진 편집장은 "디자인하우스의 강점은 직업을 이해하는 방식이 여타 잡지사와 다르다는 것"이라고 했다. "단순히 문화인을 취재하는 사람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문화인으로 성장해 문화를 전파하는 사람이 되자는 직업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보통 잡지사는 3년 단위로 이직하는데 디자인하우스는 팀마다 10년씩 근속하는 기자들도 많아요.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한 타 직장으로 이직했다가 재입사하는 비율도 높고요. 이 업계에서 흔한 현상은 아닙니다."

2층부터 4층은 업무 공간이다. 학교로 쓰던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없다. 1학년 1반, 2반, 3반이었을 교실과 수십 년 전 학생들이 걷거나 뛰었던 복도를 전부 터서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부서·업무별 이동이 잦은 잡지사 업무 특성을 고려해 벽을 허물었지만, 일정 간격으로 선 흰색 기둥들이 여전히 학교라는 공간의 따뜻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디지털미디어팀 유상원(38) 과장은 "출근할 때마다 회사가 아니라 학교에 가는 느낌"이라며 "차갑고 건조한 사무실이 아니라 교실처럼 정겨운 공간에서 잡지를 만드니 따뜻한 기운이 실리는 것 같다"며 웃었다.

전통적으로 잡지는 남성보다 여성 종사자가 많은 여초(女超) 업계다. 디자인하우스도 여성 사원이 65%에 달한다. 육아 관련 복지가 앞서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1년간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지난 29일 업무에 복귀한 월간 맘앤앙팡 오정림(37) 기자는 "엄마와 아기 이야기를 전하는 기자들이 육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모순"이라며 "우리 회사는 남자든 여자든 눈치 보지 않고 육아휴가를 쓸 수 있다. '남성 육아휴가'가 더 적극 권장된다"며 웃었다.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사회도 바뀔 테니까요."


-조선일보. 박상현 기자. 2016.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