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윤광준 씨(53)는 생활 속 명품 골라내기의 달인으로 통한다. ‘체험주의자’를 자처하는 그는 필요한 물건 중 좋다는 것은 직접 써보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린다. 만져보고, 냄새 맡고, 소리를 들어보고, 이렇게 물건과 부대끼며 교감의 경지까지 이른 물건들은 그가 내놓는 책에 실린다. 2002년 ‘윤광준의 생활명품 산책’, 2008년 ‘윤광준의 생활명품’, 올해 4월 발간한 ‘내가 갖고 싶은 카메라’를 통해 그는 꾸준히 자신이 사용한 ‘명품’을 소개해 왔다. 》
경기 고양시 일산에 있는 그의 지하 작업실에선 진공관 앰프와 1950년대 탄노이 스피커로 이뤄진 고색창연한 오디오 시스템이 먼저 기자를 맞았다. 윤 씨는 직접 원두를 갈고 커피를 내렸다.
“사진가라는 게 돌아다니는 직업이다 보니 작업의 편의와 효율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이 많아요. 또 원래 잡다한 데 관심이 많다 보니 사용한 물건들을 책으로까지 펴내게 됐죠.”
그가 책에 다룬 물건은 사진 작업에 필요한 물건뿐 아니라 사소하게 보일 수도 있는 일상 제품까지 폭넓다. 바람막이 재킷, 안경, 벨트, 만년필, 라이터, 면도기, 칼, 손전등, 팬티, 수첩, 등산화, 의자, 돋보기, 엔진오일, 휘발유 버너, 수통 컵, 휴대용 술병, 서류가방, 전기장판, 휴대용 주전자, 한지, 쓰레기통, 손톱깎이, 와인따개, 가위, 벽시계….
물건이 단순한 물건 그 이상이라는 생각은 2007년 250년 역사를 자랑하는 독일 필기구 업체 파버카스텔 본사를 방문하면서 굳어졌다. “사장을 만났을 때 ‘왜 지금 시대에 연필이냐’ 물었더니 ‘연필이 아니라 창조의 도구를 만든다’는 답을 들었죠. 연필심을 반죽하는 노직원도 같은 얘기를 해요. ‘명품을 만드는 회사는 이렇게 다르구나’ 생각했죠.” 나중에 국내의 연필 만드는 회사 사장을 만나 ‘사업이 잘되나’ 물었더니 ‘한 자루에 1000원도 안 되는 물건 만드는데 잘되겠습니까’란 답이 돌아오더란다.
“물건은 인간 정신이 물건이라는 형태로 바뀐 것”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좋은 물건이란 뭐냐”고 물었다. 그는 다시 필기구 얘기를 꺼냈다.
“일본 연필은 버터처럼 부드럽게 써집니다. 독일 제품은 거슬거슬한 느낌이 납니다. 파버카스텔 사장에게 물었더니 ‘연필의 성질이 원래 그렇다’고 해요. 흑연의 ‘물성’이 부드러움이 아니라 거슬거슬함이란 거죠. 종이를 만났을 때 사각사각하는 감촉, 소리까지 담아내야 좋다는 겁니다.”
그는 세심한 감성을 충족시키는 물건을 찾기 위해서라면 어디든 간다. 좋은 재킷을 찾기 위해 네팔 카트만두의 시장판을 헤매기도 했다. 그렇게 찾아낸 스위스 마무트사의 재킷도 책에 소개했다.
“물건을 쓰다 보면 만든 사람의 세심한 의도를 깨닫는 지점이 있어요. 마무트 재킷은 사지(死地)에 놓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필요를 충족시킵니다. 그런 지점을 만날 때, 감동이죠.”
명품이란 도구로서의 기능은 기본으로 갖추고 여기에 소리와 감촉까지 사용자의 감성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소리, 감촉은 고차원의 감각이죠. 그런 부분까지 만족시켜야 명품입니다. 분명 그런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은 굉장한 감각주의자일 겁니다.”
디지털이 대세인 시대에 아날로그는 여전히 유효할까.
“디지털은 그런 감각을 못 줍니다. 아날로그는 철저한 즉자(卽自)적 세계죠. 직접 접하지 않으면 모르는 세계입니다. 디지털은 결국 아날로그적인 부분까지 충족시키는 ‘디지로그’로 갈 겁니다. 디지털 시대에 한국 기업들은 세계적인 제품을 만들지만 아날로그 시대에는 그런 물건을 못 만들었습니다. 여전히 인간에게 필요한 게 아날로그적인 것이라면,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은 그 부분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겁니다.”
-동아일보 2012.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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