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 뜰 때면… 손을 감싸는 ‘천년의 감촉’ 잊지 못해
《 “아버지 때는 좋은 한지(韓紙)를 만들면 됐지만 지금은 소비자가 원한다면 어떤 한지든 만들어야 하죠. 그래서 문양을 넣거나 구멍을 내기도 하고 표면을 오돌토돌하게 만드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요. 아버지는 ‘엉뚱한 짓 한다’며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시지만요. 하하….” 》
경기 가평군 청평면 산골마을에 있는 ‘장지방(張紙房)’은 ‘장씨 집안에서 종이를 만드는 곳’이라는 뜻이다. 장성우 실장(45)이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아버지 장용훈 씨(75)는 201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기능보유자가 됐다. 장 실장은 “20년 이상 한지를 떠왔지만 아버지의 눈에는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이나 보다”라며 웃었다. 그래도 장 씨는 “나는 선대로부터 배운 그대로 하면서 한지를 지키려고만 애썼다. 하지만 아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한지를 개발하니 든든하다”고 했다.
‘10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한지의 원료는 국내산 닥나무 껍질이다. 장지방에서는 닥나무를 찌고 불리고 긁어내고 삶고, 고르고 뜨고 말리고 두드리는 모든 과정을 오로지 ‘손’만으로 해낸다. 닥나무 채취에서 한지 완성까지 꼬박 2주가 걸린다.
장 실장은 종이 개발을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하지만 다음 두 가지 원칙은 꼭 지킨다고 했다. 하나는 닥나무 외 다른 원료를 쓰지 않는 것, 다른 하나는 닥나무가 가진 물성을 파괴하지 않는 것.
그가 개발한 종이 중 구멍이 뚫린 미상지(未像紙)는 실내 인테리어에 많이 쓰여 요즘 특히 인기가 있는 아이템이다. 우둘투둘하면서 두껍게 뜬 종이는 만물상지(萬物相紙)다. 만들 때마다 모양이 달라지니 만물의 형상을 지녔다는 의미다. 각종 문양을 넣은 문양지와 감물을 들인 감물지, 옻을 바른 옻칠지도 화가나 공예가 등 다양한 질감과 색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아버지가 천연 닥나무와 잿물을 쓰셨 듯이 저도 그렇게 해요. 그게 가장 한지에 맞거든요. 다만 초지(抄紙·종이뜨기)할 때 (종이) 섬유를 부어 뭉치게 만들거나 흩뜨리는 등의 변화를 추구하는 겁니다.”
장 실장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왔지만 가업을 이을 걸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1년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제대한 후 대학에 복학하지 않고 한지 제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딱 5년만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당시 한지 공예가 인기를 끌면서 수요가 급증했어요. 한지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일본이나 중국 등에서도 사러왔죠. 일도 재미있고 사업도 잘되니 정말 좋았어요. 지금은 그저 ‘이게 내 인생’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있죠.”
그에게 한지를 잘 떴을 때와 그러지 못했을 때의 차이가 무엇인지 물었다. “예전엔 실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좋지 않게 뜰 수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정말 잘 떠졌을 때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고 했다. 눈으로도 섬유 입자가 확 퍼지는 게 보이지만 손에도 차짐이 느껴진다는 것. “메밥이 아니라 찰밥이랄까. 한 번 떠먹고 싶을 정도로 쫀득해요. 그 느낌이 너무 매혹적이어서 꾸준히 한지를 만들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동아일보 201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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