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7-30 11:25
시대를 비추는 북디자인 ⑤ 근대 한국 최고의 장정가 정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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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북디자인이란 용어가 통용되기 전 널리 사용되던 단어가 있다. 바로 장정(裝幀)이다. 엄밀히 말해 장정은 기획·편집·제본 등 복합적인 과정이 얽혀 있는 북디자인과는 다른 개념이다. 장정은 책 표지 디자인에 집중된 개념이다. 하지만 시대로부터 자유롭거나 독립적인 디자인은 없다. 북디자인 개념이 수립되기 전 책 표지 디자인에 집중한 것은 그 시대적 상황이었다. 장정은 초기 형태의 북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장정가 정현웅(작은 사진)은 한국의 초기 북디자이너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 중 하나다.

정현웅은 1911년에 태어나 화가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광복 후 처음 등장한 시사교양지 ‘신천지’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6·25전쟁 이후 월북해 76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 작업, 아동화·역사화 장르에서 활약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화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가난했기에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술전람회에서 연이어 입선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게 된다. 1935년 동아일보 연재소설 ‘먼동이 틀 때’(이무영)에 삽화를 그리기 시작할 무렵 이미 그는 당대 가장 주목받는 삽화가 중 한 명이었다. “이번 소설은 숨은 삽화가로 혜성같이 돌현하여 삽화계의 폭탄적 경이를 나타낸 정현웅씨의 삽화로서 독자 앞에 나타나게 되었으니 새해 첫날에 이에서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동아일보 1935년 12월 24일자) 이 기사는 정현웅이라는 화가 겸 삽화가에 거는 당시의 기대를 고스란히 전한다.

삽화가로서의 대중적 인지도는 자연스럽게 그를 장정가로 활동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장정가로 활동한 이들은 대부분 화가였다. 이들은 책 장정을 맡아 표지와 표제지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렸다. 김환기·구본웅·이인성·임상범 등이 화가 출신 장정가 군을 형성했고, 여기에 정현웅도 함께 이름을 올리게 된다.



정현웅이 장정가로 활동을 시작한 1930년대는 그래도 꽤 고급스러운 장정이 이뤄졌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장정가의 이름이 책에 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이 시작되면서 출판계는 불황을 맞는다. 이는 질 낮은 책과 장정이 양산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열화당, 1999)을 쓴 박대헌에 따르면 당시 가장 큰 문제는 종이 부족이었다. 고급스러운 장정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고 책 디자인은 갱지와 사륙판이라는 한정된 범위 내에서만 이뤄졌다. 종이 질이 좋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표지 그림이 장식적이거나 화려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게 박대헌의 분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장정가들이 선보인 장정은 당대 문인과 화가들의 우정 어린 협업을 통해 나온 문화 생산의 상징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정현웅은 이들 중에서도 개성 있는 화풍과 미감으로 장정을 진행해 당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았다.

판소리를 다룬 조선창극사1는 그의 이런 면면을 엿볼 수 있다. 정현웅은 책 표지에 화려한 봉황과 구름을 그려 넣었다. 황색 표지를 배경으로 초록과 붉은 색이 눈에 띄는 굵은 선의 봉황 이미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황제2(이효석)는 소박하지만 서양문화에 대한 정현웅의 해석이 돋보이는 책이다. 앞 표지 중앙에는 한자로 제목과 저자명을 쓰고, 그 둘레엔 당초 무늬를 그려 넣었다. 뒤 표지엔 서양식 촛대가 그려졌다. 장식적이고 화려한 프랑스 문화의 상징으로써 촛대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현웅은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장정가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흙의 노예(이무영), 을유문화사에서 출판된 불3(안희남), 맥麥(김남천) 등에서 그의 텍스트에 대한 시각적 해석은 대부분 문자 중심의 표지 작업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정현웅의 개인적인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이 조선총독부로부터 강제 철거당한 것을 계기로 화가의 길을 포기하게 된다. 당시 암울한 상황을 사실주의 미술로 담아내고자 했으나 검열 속에서 현실을 그려내는 것은 투쟁 그 자체였다. 그가 진로를 순수미술에서 삽화와 장정으로 바꾼 배경엔 이런 시대적 상황이 있었다.

문화적인 뿌리가 난도질당했던 시대에 만들어진 책은 지금 기준에서 보면 허술해 보일 수밖에 없다. 특히 동시대 유럽에서 만들어진 서적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더더욱 그렇다. 당시 유럽에서는 모더니즘 언어가 북디자인의 영역으로 파고 들어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북디자인 방법론이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을 때다. 하지만 우리에게 책 문화는 일제의 틀 안에서 몸부림치던 복종과 저항의 산물이었다.

20세기 초. 유럽이 양(陽)의 시대였다면 한국은 음(陰)의 시대였다. 양과 음 사이에서 한국은 서양의 북디자인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장정은 그 갈라지는 길목에 자리한 이 나라 북디자인의 또 다른 이름이다. 당시의 장정을 통해 한국의 감추어진 북디자인의 역사와 20세기 초 억압된 현실 속에서도 책을 만들었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 어떤 디자인도 결과물만을 두고 이야기할 수 없다.” 영국의 디자인 역사가이자 북디자이너인 리처드 홀리스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디자인은 시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시대의 산물이다. 정현웅의 장정 작업에선 암울한 시대적 상황과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예술가의 몸부림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한국 북디자인 역사의 일부다.

-광주일보 2012.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