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도 발행된 미사용 적동(赤銅) 10원짜리 동전은 70만 원을 호가한다. 1998년도 500원짜리 동전도 액면가의 2000배인 100만 원 선에 거래된다. 10원이 10원이 아니고 500원이 500원이 아닌 것은 상식 밖의 일이지만 화폐수집가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가치다. 전문 수집가들은 화폐를 재테크의 수단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각국의 화폐에 담긴 인물, 문화재, 풍경을 통해 국경을 넘나들며 여행을 한다. 돈 수집을 즐기지만 결코 돈을 소비하지 않는다는 이들만의 세계는 보통 사람에게 매우 흥미롭다. 지난 9일 27년간 250개국 화폐 2만5000점을 모은 화폐수집 마니아 김진산(40·경남경찰청 마산동부경찰서 경사) 씨를 만났다.
수집가들은 대부분 보안상의 이유로 자신의 집을 공개하는 것을 꺼리지만 김 씨는 창원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취재진을 맞았다. 그의 안방 책장은 수집한 화폐로 가득했다. 수집품은 20여 개의 지폐앨범과 코인(동전)홀더에 대륙별로 정리돼 있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들은 박스에 가득 담겨 있었다.
김 씨가 화폐수집의 세계로 빠져든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인 1985년. 구슬 모으기 딱지 모으기 등의 취미를 갖고 있던 그는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며 해외를 오가던 외삼촌에게서 싱가포르 지폐(2달러) 한 장을 선물 받았다. 지금도 지폐앨범에 곱게 간직돼 있는 이 지폐가 김 씨를 화폐수집의 세계로 이끌었다.
“새(鳥) 도안이 그려진 싱가포르 지폐를 처음 받았을 때 우리나라 돈하고 너무 달라 신기했어요. 당시만 해도 외국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이 지폐를 선물 받은 뒤 싱가포르라는 나라를 알아보기 위해 지도책을 펴보고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을 찾아 공부도 했어요. 200개 나라의 수도를 모두 외울 정도로 사회와 지리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후 외삼촌에게 다른 나라 돈도 가져다 달라고 사정해 화폐수집을 시작하게 됐죠.”
중학생이었던 김 씨는 화폐수집에 빠져들면서 용돈이 생기면 모두 수집에 털어 넣었다. 주변 친구들에게 집에 외국돈 있으면 가져오라고 해 50원, 100원을 주고 마구 사들였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도안이 아름다운 스리랑카 구권지폐 컬렉션 중 5루피 지폐를 구하려고 60㎞ 떨어진 부산까지 간 적도 있다.
“마산지역 화폐판매상을 모두 돌아다녔는데 구할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부산 중구 광복동에 화폐상이 몰려 있다는 소문만 듣고 무작정 부산행 버스를 타고 갔어요. 그곳에서 그토록 찾던 5루피 지폐를 발견하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지폐를 보자마자 몇 달간 모은 ‘거금’ 3000원을 내고 얼른 손에 넣었는데 그때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혼자 겁도 없이 부산에 다녀왔다고 부모님께 엄청나게 혼이 났어요.”
화폐를 수집해 되파는 사람이 있지만 김 씨는 오로지 모으기만 했다. 화폐수집을 재테크의 수단이 아니라 취미생활로 여겼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화폐수집을 시작한 한 대학교수를 만났는데 1년간 3000만 원을 들여 고가의 화폐를 수집했다고 자랑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모으면 절대 취미로 수집활동을 할 수 없어요. 신권은 매년 계속 발행되고 고가의 희귀 화폐나 국가별 화폐도 너무 다양하고 많아 모두 모으려면 끝이 없어요. 마음을 비우고 자기가 원하는 테마의 화폐를 찾아 모아야 오랫 동안 수집활동을 계속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제게 있어 화폐수집은 ‘자기만족’이죠.”
김 씨는 화폐수집을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화폐를 통해 세계 각국의 문화와 인물, 풍경을 새롭게 알아 가는데 관심이 많다. 화폐에 담긴 인물이나 건축물은 그 나라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어서다. “아르헨티나 구권 화폐에는 산마르틴(San Martin·1778∼1850년) 장군의 이미지가 도안돼 있는데, 그는 스페인으로부터 남아메리카를 독립으로 이끈 영웅이에요. 그런 역사적 인물을 통해 세계 각국의 흥미로운 역사를 알 수 있다는 게 재미있죠. 비아프라(Biafra)라는 나라의 화폐도 갖고 있는데 이 나라는 1967년 나이지리아로부터 분리, 독립했지만 1970년 내전으로 그만 역사에서 사라져버려 지금은 제 지폐앨범에 남아있죠.”
수집가 중에서는 금화, 인물·동물도안, 엽전 등 테마 별로 모으는 사람이 있지만 김 씨는 경제적 능력 한도 내에서 현재 통용되고 있는 세계 각국의 화폐를 수집하고 있다. 그런 탓에 그의 소장품 중에는 아직 수백만∼수천만 원에 거래되는 고가의 희귀 화폐는 없다.
“소장하고 있는 2만5000여 점의 가치는 5000만 원 정도될 겁니다. 이중 직접 화폐상 등을 통해 구입한 것은 40% 정도이고 나머지는 주변사람들에게 기증받거나 교환형식으로 모은 것이에요. 2008년에는 ‘화폐수집 달인’으로 언론을 탄 적이 있는데, 그때 방송을 보고 부산에 사는 한 80대 할아버지가 전화를 걸어와 40년간 외항선원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수집한 화폐 1000여 점을 주겠다며 연락이 왔어요. 집으로 찾아가보니 가족 없이 홀로 살고 있더라고요. 할아버지는 ‘이제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갖고 있어봐야 팔 줄도 모르고 가치도 모르겠다’면서 모두 가져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그냥 가져올 수 없어서 ‘약값’하시라고 성의를 표시하고 받아왔어요. 이후 한 번씩 찾아뵙고 말동무가 되어 드리곤 했는데 지난해부터 돌아가셨는지 연락이 안돼요. 또 한 번은 교회 목사님이 전화를 걸어와 누군가 헌금으로 세계 각국의 화폐 500여 점을 내놓았다면서 우리는 가치를 모르고 처분할 수도 없어 기증하겠다고 연락이 왔길래 찾아가 헌금 형식으로 돈을 내고 받아온 적도 있어요.”
대부분의 마니아가 그렇듯이 한 가지에 몰두하다 보면 ‘미친놈’ 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특정번호의 지폐를 찾기 위해 벌금 납부된 1만 원권 지폐의 일련번호나 동전의 제작연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면 직장 동료들은 ‘또 저런 짓을 하고 있다’며 핀잔을 줘요. 조사를 받기 위해 경찰서를 방문하는 외국인이나 길거리에서 만난 외국인들한테도 다가가서 짧은 영어로 말을 걸고 손짓 발짓으로 자기나라 돈을 갖고 있는지 묻기도 해요. 이런 모습을 본 아내는 팔을 잡아끌며 ‘창피하다. 하지마라’며 말리지요. 그래도 저는 혹시 한 개라도 건질 수 있을까봐 뭐라고 하든 간에 끝까지 물어보는데 그렇게 해서 구한 화폐는 지금까지 한 개도 없었어요. 하하.”
김 씨는 발품을 팔던 예전과 달리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화폐를 수집하고 정보를 공유한다. 인터넷 화폐수집 동호인은 다음카페의 경우 9000여 명, 네이버에는 3만 명 정도가 활동하고 있다. 김 씨는 한 수집카페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회원들이 갖고 있는 화폐가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물어오면 답변해 주기도 한다.
“100원 동전은 첫 발행된 1970, 1981, 1998년에 제조된 것이 소장가치가 높아요. 제조량이 적어 희소가치가 있기 때문이죠. 1998년 제조된 500원 동전도 금융위기 등으로 한국은행 주화 발행량이 거의 없어 요즘 80만∼100만 원에 거래돼요. 제가 이런 내용을 인터넷에 올리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주면 저금통을 깨서 찾아보는 사람이 있는데 20∼30년간 모은 저금통이라면 모를까 그런 동전을 찾기 어려워요.”
김 씨는 전 세계 화폐로 안방에서 각국을 여행했지만 정작 해외여행을 가본 것은 2002년 신혼여행으로 화폐수집의 세계로 이끈 싱가포르에 가본 것이 전부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화폐를 통해 배운 것을 각국을 방문해서 직접 보고 느끼고 싶어요. 낚시나 골프 같은 다른 취미는 돈을 소비하는데 화폐수집은 돈을 저금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수집한 화폐는 팔지 않고 모두 아들에게 물려줄 거예요. 경제적 여력이 되면 전시회도 열어 소장품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기도 하고요.”
- 문화일보 2012.9.12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091201033443177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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