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9-26 15:05
‘째깍째깍’ 시계침 소리에 미쳤다… 60년 세월가는 줄 몰랐다 - 아날로그 시계 수집가 박기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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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개의 눈금 사이로 세 개의 크고 작은 막대가 서로 다른 속도의 회전을 하는 아날로그 시계 위로 삶의 시간이 흐른다. 아날로그 시계는 째깍째깍 특유의 소리를 내며 우직하게 우리 곁을 지켜왔다. 이제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휴대전화 액정화면을 통해 디지털 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는 시대가 됐지만, 여전히 시침과 분침, 초침을 상호교차하는 움직임으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아날로그 시계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다. 더욱이 최근 앤티크 물건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아날로그 앤티크 시계에 대한 인기도 높아지고 있다. 또한 앤티크 시계는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주는 패션 아이템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건축 디자이너 박기태(60) 씨는 어린 시절부터 아날로그 시계와 함께 하는 삶을 살아오며 시계 수집가가 됐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 인천국제공항 등 한국 주요 건축물의 인테리어 디자인을 해온 건축사무소 KDA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이며, 현재 서울예술대학 교수로 후학들도 길러내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그의 집으로 들어서자 벽면과 유리 장식장 등에 가득한 시계가 먼저 반긴다. 현재 그가 소장하고 있는 아날로그 앤티크 시계는 무려 3000여 점. 벽걸이 시계, 알람시계부터 회중시계, 손목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와 브랜드, 기능을 갖춘 컬렉션을 자랑한다. 이 중에는 1억 원이 넘는 고가의 시계도 있다.
박 대표가 시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60년대 10대 소년시절 아버지 손을 잡고 남대문 시장, 도깨비 시장, 청계천 일대 등을 들락날락하며 신문물들을 구경하던 것에서 시작됐다. 당시에는 옛 시계의 케이스를 바꿔 새 것처럼 만들어 주는 일명 ‘케이스 갈이’가 유행이었는데, 어린 그의 눈에는 엄청난 신기술로 보였다. 또한 그의 큰아버지 박일구 씨는 당시 남대문 시장에서 ‘리코 박’이라는 예명으로 더 유명한 시계 수입가였다고 한다. 그는 “큰아버지는 당시 상당한 부자였는데 아마 그 당시 시계 밀수도 하셨던 것 같다”며 “그분 곁에는 항상 진기한 시계가 많았는데 어린시절부터 이런 주변 환경으로 인해 시계를 구경하고 시계방 주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내 취미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시계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커서 물 속에서 신기한 시계를 줍거나 하는 꿈을 많이 꿨다고 어린시절을 회상했다.
박 대표가 시계 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0대가 된 1970년부터였다. 그는 외숙부이자 한국 현대 건축의 거장 고 김수근 선생의 시계 수집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1986년 세상을 떠난 김수근 선생은 생존 시 열정적으로 시계를 모았고, 외국 여행을 다닐 때마다 지인들의 선물로 시계를 사왔다. 박 대표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배워 외국 여행을 가면 앤티크 시계들을 사 모았고, 시계선물을 즐겼다. 그는 좋은 시계를 선물하는 것은 ‘최고의 행복’이라고 표현했다. 시계를 모을 때 가격이 정하는 가치는 중요하지 않다. 그는 “시계 모양과 움직임, 특유의 소리 등이 가장 중요하다. 특히 시계 태엽을 돌릴 때 손맛과 소리가 너무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가 생각하는 앤티크 시계만의 매력은 “다시는 생산되지 않고, 대량 생산될 수 없는 점”. “과거에는 시계 크래프트맨십(장인정신)이 있어서 100년, 150년 지난 시계도 분해해 안을 보면 부속품들이 정확하게 맞아 있다. 당시에는 보석상에서 보석을 다루던 섬세함으로 시계를 만드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시계는 기능뿐 아니라 그 안의 디자인이 너무 근사하다. 안을 들여다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다. 그래서 보석상이 만든 시계를 일부러 찾기도 했다”고 그는 말했다. 또 “근대적인 아날로그 기계 시계는 유럽에서 시작해 미국, 아시아 등 전세계로 퍼지면서 발전했는데, 특히 기차의 발명으로 중요해졌고 전쟁 때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시계의 의미를 생각하면, 마치 하나하나의 시계에는 쓰던 사람의 혼이 서려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아 가끔 경건해질 때도 있다”고 밝혔다.
그에게는 2차 대전 때 폭격용 시계로 쓰인 예거 르쿨트르(Jaeger-Lecoultre)라는 기념비적인 시계가 있다. 이 시계는 전쟁 때 정확한 시각에 폭격을 하기 위해 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으로, 미세한 시간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시계의 뒷면에는 소유했던 군인의 번호가 새겨져 있다. 스위스의 시계브랜드인 예거 르쿨트르는 베니스국제영화제의 부상이기도 해, 최근 영화 ‘피에타’로 황금 사자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이 부상으로 2000만 원 상당의 예거 르쿨트르를 받았다. 이밖에 첼시 클락 코퍼레이션 사의 항공모함용 시계, 타이태닉 호 벽에 걸렸던 스미스 아스트랄과 스미스 엠파이어의 동일 모델 시계도 박 대표가 아끼는 소장품이다.
그는 시계 수집을 위해 유럽을 주 무대로 전세계 61개국을 다니면서 독특한 시계, 역사를 간직한 시계를 모았다. 온라인 중고장터인 이베이도 이용하고, 다른 시계 수집가들과 시계를 교환하기도 한다. 또한 과거 시계 수집가들이 유품으로 남긴 시계들을 그 자손들을 통해 얻기도 한다. 그가 시계광이라는 것을 아는 지인들이 외국여행을 갈 때마다 시계를 선물한 적도 많다. 그는 “무언가를 10개 모은 사람보다 100개를 모은 사람에게는 그 사람하면 그 물건이 떠오르는 효과가 나타나 더 희귀한 것들을 주변에서 전해주는 일이 생긴다”고 말했다. 가장 최근에는 지인인 샘터사의 김성구 대표가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시계를 선물해줬다. 그는 “지인들의 소중한 시계를 받게 되면 그 사람들의 마음을 갖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이렇게 지인에게 얻은 시계에서 생각지 못한 보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는 “예전에 한 친구가 외국 한 동네의 작고 오래된 가게에서 구한 시계를 줬는데 그게 바로 바쉐론 콘스탄틴이라는 명품이었다. 그 친구는 200달러를 주고 구매했는데, 실제 가격은 2만 달러 이상이다. 시계 상표가 앞면에 없고, 그 안에 있어 가치를 몰랐던 것 같다”면서 눈을 반짝였다. 시계회사 중 가장 오랜 256년의 역사를 가진 스위스 시계회사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는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와 함께 세계 3대 고급시계로 불린다.
박 대표는 오랜시간 수집을 하며 자연스레 시계 전문가가 됐다. “얼핏 모양만 봐도 몇 연도에 어디서 만들어진 시계인지 파악할 수 있다”는 경지에 오른 것. 그는 “직접 공부하기보다 자주 시계방에 가서 다양한 모델들을 보고,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렇게 됐다”고 말했다. 수리도 직접 한다. 그는 “정교한 작업은 아니지만, 시곗줄 디자인을 바꾸거나 길이를 조정하면서 나만의 시계를 만드는 즐거움이 있다. 특히 외국 벼룩시장에서 고장난 시계를 저렴한 가격에 사 가지고 와 고쳐 생명을 되살리는 것도 특별한 재미”라고 밝혔다. 그의 시계 사랑은 전공을 살려 시계 디자인으로도 이어졌다. 지난 1986년 미국 뉴욕에서 디자인 명문 프랫 예술대 대학원에 유학할 당시, 모던한 디자인의 벽시계로 ‘그웬 코브 시티 디자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박 대표는 “죽기 전 이 많은 시계를 용광로에 넣어 녹여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망을 드러냈다. 그는 “지인 조각가 유대균 씨와 일전에 의논했던 일로, 20년이나 30년 후보다 구체화된 구상을 갖고 퍼포먼스를 벌이고 싶다. 시계 하나하나에 애착이 강해 박물관에 기증하기보다 이 의미있는 퍼포먼스를 인생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 문화일보 2012.9.26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092601033432158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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