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0-18 10:54
독일의 세계적 역사학자, 서울대에 1만2000권 기증

지난 12일 독일 수도 베를린 남쪽 주택가 달렘의 한 가정집. 가을 햇볕이 쏟아지는 2층 서재에서 백발의 남성이 알록달록한 책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서재 벽면을 둘러싼 책장은 이가 빠진 듯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서재 주인은 세계적 역사학자 위르겐 코카(71) 전 독일 베를린자유대 역사학부 교수. 그는 50여년 동안 베를린 시내 연구실 3곳과 자택에 뒀던 장서 1만2000여권 전체를 서울대에 기증하기로 했다. 서울대 측은 "세계적 석학이 대규모 장서를 기부하는 것은 개교 이래 처음"이라며 "금액으로 따지면 10억원 정도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라고 밝혔다.

코카 전 교수는 전통 역사학에 대항해 사회학적 시각을 역사학에 도입한 빌레펠트 학파의 창시자다. 독일 파시즘 등장의 이유를 여타 서구 국가와 다른 비정상적 근대화에서 찾은 '존더베크(Sonderweg ·특수한 길)' 이론으로 1980년대 세계 역사학계에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코카 교수는 '기부한 효과가 크고, 세계적으로 훌륭한 연구 성과를 내는 기관'을 기부 대상 선정 기준으로 삼았다고 했다. "일본이나 중국에 기증할 수 있었겠지만 단기간에 경제적·민주적으로 성공한 한국에 경외감을 느껴왔어요. 뛰어난 한국인 동료·제자들과 함께 연구하면서 관심을 갖게 됐지요."

그는 최근 한·일 간 과거사 논쟁에 대해 "역사란 건 때로는 돌아보기 매우 고통스럽다"면서도 "결국은 솔직하게 과거를 돌아보고 사과하는 게 언제나 장기적으로 이익"이라고 강조했다. "어떻게 역사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국가의 정체성이 결정됩니다. 독일의 경우 나치즘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고 사과했어요. 그 덕에 끔찍한 전쟁 범죄에도 불구하고 이웃 국가와 관계를 회복했고 국가 내부적으로도 결속을 강화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일본도 고통스러운 과거사를 직시하는 게 이익입니다."

은퇴 뒤에도 활발한 연구를 진행 중인 코카 전 교수는 지난 9일 1차로 장서 3000권을 서울대에 보냈고, 2~3년 뒤 3000~4000권을 추가로 보내는 등 시차를 두고 전체 서적을 기증하게 된다. 지난 8월 베를린을 방문해 기증 도서를 살펴본 안병직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코카 교수의 서적은 대부분 역사 및 사회과학 관련 독일어 서적으로 이미 절판된 희귀본도 많다"며 "영어 외 유럽어 서적이 부족한 서울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제가 해 둔 메모 때문에 읽기에 성가실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학생들이 훌륭한 역사학자나 좋은 시민이 되는 데 이 책들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다른 국가에도 폭넓은 관심을 지닌 코스모폴리탄이 되면 더욱 좋겠지요."

- 조선일보 2012.10.1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17/20121017031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