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2-01 10:12
어느 한의사의 60년 진료 기록, 살아있는 '역사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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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문 연 보춘의원
지금의 낙원상가 자리에… 환자 10만명 처방전 남겨
한의학 발달 과정뿐 아니라 당대의 생활상도 보여줘
해방 이전, 감기 환자가 最多
심훈·윤극영 등도 단골, 변호사·훈장까지 직업 다양
비싼 서양병원 인기 덜 해… 진료비는 추수기에 몰아서
1914년부터 1974년까지 60년간 유명 한의사가 꼼꼼하게 기록한 진료 기록이 공개돼 근대 한국의 의료변천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게 됐다. 최근 경희대 한의과대학은 "한의사인 청강 김영훈 선생이 60여년간 기록한 진료부와 처방전에 대한 전산화 작업을 끝내고 연구 중에 있다"고 밝혔다.
청강 김영훈은 23세 때인 1904년 근대 한의학 교육기관인 동제의학교 교수로 선발돼 한국 한의학을 이끌어 왔다는 평가받는 인물이다. 그는 고종 퇴위로 동제의학교가 문을 닫자 1909년 지금의 서울 낙원상가 자리에 보춘의원을 열었다. 한의학계에서 관심을 보이는 자료는 그가 이 보춘의원에서 60여년간 진료를 하며 적은 진료부와 처방전이다. 이 자료들은 경희대에서 대리 보관해 오다가 김영훈의 큰아들 김기수(85) 전 포르투갈 대사가 지난달 경희대 한의과대학에 공식 기증했다.
청강 김영훈 선생의 유족이 지난 10월 경희대에 기증한 처방전과 진료기록부 등 유품 1600여점(왼쪽 사진). 유품 중에는 지난 8월 문화재청이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21건 955점이 포함돼 있다. 당시 진료부에는 이름, 발병일, 성별, 나이, 직업 등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오른쪽 사진). / 경희대 제공 1914년 4월부터 시작하는 그의 진료 기록은 작고하기 6개월 전인 1974년 1월까지 이어진다. 6·25전쟁 기간을 제외하고 매년 일정량의 진료 기록이 보존돼 있는데 대략 연인원 10여만명에 관한 방대한 자료다. 이 안에는 어떤 직업의 누가, 언제, 어떤 병으로 어떤 처방을 받았는지가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지난 8월에는 유품 1600점 가운데 진료기록부 등 955점이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보춘의원을 찾은 단골 대부분은 낙원상가 인근 북촌의 상류층이었다고 한다. 진료부를 보면 내원환자 대부분은 경운동, 익선동, 인사동, 관철동, 관훈동 등 인접 지역의 환자가 다수다. 동요 반달을 작곡한 윤극영, 독립협회를 창립한 이상재 선생, 소설가 심훈도 감기로 이곳을 찾았다. 하지만 강화도나 청주 등 지방에서 올라온 환자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 제주도에서 올라온 경우도 있다.
상류층뿐만 아니라 농부, 상인 등 다양한 계층이 이곳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진료부의 직업란에는 변호사, 은행원, 변사 등 근대적인 직업부터 훈장 등 전근대적인 직업까지 다양했다. 심지어 직업란에는 '매춘부'라고 적은 경우도 있었다. 광복 이전까지 직업이 기재돼 있는 환자 중 가장 많은 건 무직(6199건)이었고 학생(4938건), 상인(1994건)이 그 뒤를 이었다. 경희대 한의과대학 의사학교실 김동율씨에 따르면 "당시 서양 의학이 도입되고 있었지만 워낙 소수였고 가격이 비싸 대부분은 한의학을 선호했다"고 한다. 양반들의 경우 왕진을 통해 진료를 받은 뒤 하인들이 의원에 가서 약을 받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진료비도 진료를 받을 때마다 주는 방식이 아니라 한꺼번에 몰아 추수기에 주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해방 이전까지 보춘의원을 찾은 이들의 증상 중 가장 많은 것은 지금의 감기에 해당하는 '감모(感冒)'였다. 복통과 설사도 빈도가 잦았다. 말라리아와 유사한 '학질(瘧疾)은 해방 이전에는 765건이나 있었지만 광복 이후 수가 대폭 줄었다.
1914년부터 1935년까지의 진료 기록 중에는 '탈영증(脫營症)'도 508건이나 있었다. 탈영증은 지위가 높았다가 갑자기 지위가 낮아지며 생기는 병이다. 흥선대원군의 맏며느리이자 고종 황제의 큰형수인 흥친왕비(興親王妃)가 1953년 이 병으로 치료받은 기록도 남아 있다. 경희대 한의과대학 김남일 학장은 "이처럼 꾸준한 기록은 동아시아를 통틀어서 유일무이하다"며 "근대 한의학이 어떻게 발달해왔는지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2.12.1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30/20121130013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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