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7-28 11:25
“어학연수하다 우연히 발견한 옛책 한권이 인생 바꿨죠”-수집가 지보람씨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804644.html [470]

[짬] 한국 근현대출판물 수집가 지보람씨


새내기 한국근현대사료 수집가인 지보람씨가 지난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자신의 수집품을 보여주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1920년대 한국인 독일 유학 1세대인 한글학자 이극로가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규탄한 독일어 선언문과 출판물 원본이 지난 25일 <한겨레>를 통해 처음 소개됐다. 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이 원본의 발굴자는 4년차 ‘직업 수집가’ 지보람(32)씨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지씨의 손에는 커다란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보유하고 있는 수집품들 가운데 제일 자랑하고 싶은 것들만 몇 가지 챙겨 왔다”고 했다. ‘이극로 자료’는 독일의 고서점에서 몇 년에 걸쳐 입수한 것이다. 그는 한국 근현대 자료들을 이것저것 살피다가 ‘코루 리’, 곧 이극로와 그가 독일에서 남긴 출판물들의 존재를 알게 됐고, 그 원본이 나타나기를 꾸준히 기다렸다고 한다. “원한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저 나름대로 자료를 찾아내는 방법이 있긴 한데, 그걸 알려드릴 순 없어요.”

2008년 영국 스완지 고서점서 만난
‘올드코리아-고요한 아침의 나라’
취미로 옛 사료 모으다 2014년 ‘결단’

이극로 독일어 선언문 원문도 ‘발굴’
개항기 한국 선교사 행적 사료 ‘관심’
“혼자 가는 ‘장인의 길’…박물관 열고파”

지씨의 쇼핑백 안에서는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파리통신국이 발행한 ‘한국의 독립과 평화’란 제목의 프랑스어 인쇄물도 나왔다. 당시 신한청년단 대표로서 파리강화회의 참석차 프랑스에 왔던 김규식이 한국의 현실을 알리고자 만들어 배포했던 인쇄물이다. 1919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회(코리아 내셔널 어소시에이션·KNA)가 발행한 영문 인쇄물, 같은 해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만든 ‘한국통신부’(코리아 인포메이션 뷰로·KIB)에서 발간한 영문 인쇄물 등도 나왔다.

그는 “한국 개항기 선교사들의 활동이나 독립운동과 관련된 출판물들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집가들마다 활동 영역이 천차만별인데, 자신은 비교적 좁은 틈새를 집중적으로 파헤치고 있다는 것이다. 경매 등을 통해 수집품을 개인이나 박물관 같은 기관에 파는 것이 주 수입이라 했다. 때론 특정 자료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기도 한단다.

“2008년께 어학연수로 영국 스완지란 곳에 머물렀는데, 우연히 그곳에 있는 고서점에서 <올드코리아-고요한 아침의 나라>란 책을 만나게 됐어요. 스코틀랜드 출신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가 한국을 방문한 뒤 남긴 그림과 글을 모은 책이에요. 그때부터 옛날 책을 모으는 취미를 갖게 됐죠.”

그는 어릴 때부터 종교에 관심이 많아, 언더우드나 헐버트 같은 개항기 한국 선교사들의 행적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2014년 다니던 회사를 아예 그만두고 직업 수집가로 새 길을 정했다.

“어렸을 때부터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낙오자가 되진 않을까, 엄청난 압박에 시달렸어요. 회사 다닐 때에는 지푸라기도 안 주면서 벽돌을 만들라 강요받는 히브리 노예 같다는 생각까지 했지요. 이래서는 도저히 행복할 수 없겠다 싶어서 그냥 회사를 그만뒀어요. 하고 싶었던 일을 해야겠다 싶어서 취미였던 수집을 업으로 삼게 됐고요.”

일을 가르쳐줄 사람은커녕 어깨너머로라도 배울 수 있는 사람도 없었지만, 스스로 해나가다 보니 고서적이 등장하는 주기를 읽을 수 있는 등 자기만의 노하우가 제법 쌓였다고 한다. 국외의 고서점이나 박물관 등에 나름의 네트워크도 점차 쌓이고 있다고 했다. 특히 지금은 판매해서 갖고 있지 않지만, 2015년 초에 미국의 고서점에서 존 로스 선교사가 만든 최초의 우리말 성경인 <요한복음>(1883년 발간된 재판)과 <마가복음>(1884년 발간된 초판)을 수집했던 것은 수집가로서 지씨의 큰 자랑거리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지씨는 자신의 수집품 가운데 19세기 말 출간된 <코리안 게임스>라는 책을 꺼내어 펴 보였다.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그림을 중심으로 다양한 한국의 놀이문화를 담은 이 책에는 갓장이, 궁장이 등 장인들의 모습도 등장한다.

“저는 장인이 되고 싶어요. 요즘 ‘대기업에 다녀야 한다’ 따위의 말을 입버릇처럼 하잖아요. 하지만 ‘메인스트림’을 무작정 따를 것이 아니라 옆길로 가서 자기만의 전문성을 갈고닦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스스로 선택한, 수집가로서 저만의 길을 계속 가고 싶어요. 언젠가 먼 훗날에 저만의 박물관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 꿈이에요.”



-한겨레신문. 최원형 기자. 2017.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