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5-01 12:04
[헌책방 주인장의 유쾌한 책 박물관] <6>뿌리깊은나무의 ‘민중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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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다양한 지역에 뿌리를 내려 삶을 살아 온 평범한 민중의 입말을 그대로 살려 기록한 ‘민중자서전’. 우리나라 구술사 연구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사진2) 한국브리태니커회사 창업자이자 최초의 한글전용 월간지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의 발행인 겸 편집인 한창기. ‘민중자서전’에서도 함께 작업한 사진작가 강운구가 찍은 사진.
(사진3) 1976년부터 1980년까지 발행한 잡지 ‘뿌리깊은나무’ 창간호. 본문에서 한자병기를 없애고 한글만 사용하는 파격적인 편집을 시도했다.
(사진4) 1984년에 창간한 잡지 ‘샘이깊은물’은 종래의 시각에서 탈피해 현대감각의 여성주의 관점을 드러낸 간행물이다. 표지모델도 유명 연예인을 지양하고 평범한 여성을 화면 가득 담아냈다.
(사진5) 참신한 편집과 알찬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은 ‘뿌리깊은나무’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 사진은 폐간을 알리며 신문에 게재한 광고.


민중의 입에서 나오는 대로 쓴 ‘오래된 미래’


헌책방이라고 해서 책을 무조건 싸게 파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표지 뒤에 쓰인 정가보다 비싼 것도 있다. 큰 틀에서 보자면 책도 다른 물건과 비슷하게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된다. 책이 처음 출판되어 서점에서 팔릴 때는 정가를 받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 그 책이 절판되면 더이상 구할 수 없게 되니까 헌책방에선 자연스레 가격이 올라간다. 하지만 모든 책이 그런 운명을 가지는 건 아니다. 절판됐다고 하더라도 그 책을 구하는 사람이 적으면 굳이 가격이 비싸질 이유는 없다.

책값이 달라지는 이유엔 좀더 복잡한 사정이 더해진다. 책의 내용과 저자의 철학이 훌륭해야 함은 물론이고 책 표지가 아름답다거나 장정의 훌륭함 등 책의 전반적인 만듦새도 가격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어떤 경우엔 번역자나 편집자 그리고 출판사 대표의 철학도 가격에 반영된다. 이런저런 이유가 더해진 결과, 헌책방에서 비싸게 팔리는 책은 전체를 두고 보면 극소수일 뿐이다.

가격을 결정하는 요소가 많다 보니 책 가격이 오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한동안 비싸게 거래됐다가 가격이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또 가격이 오를 때가 있고…. 책의 운명도 생명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헌책방 주인장은 이런 가격변동 요인을 그때그때 잘 알아두어야 한다. 가격이 비싸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책은 아니겠지만 절판된 책 중에 가격 등락폭이 오랫동안 변함없이 유지되는 책이라면 헌책방에서만큼은 널리 사랑받는 책이라 부를 만하다. 다른 헌책방에서 직원으로 일한 것까지 합치면 이쪽 계통에서 일한 지 10년을 훌쩍 넘기게 되었는데, 그러면 어떤 책이 손님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느냐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번 해봐도 되지 않나 싶다.

곰곰이 생각해본 끝에 내린 결론은 ‘뿌리깊은나무’ 출판사에서 펴낸 책들이다. 이 출판사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들여온 한창기(1936~1997)씨가 만든 회사다. 같은 이름으로 발행한 잡지를 기억하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한국브리태니커회사를 운영하던 그는 1970년 4월에 ‘배움나무’라는 제목으로 사보를 만들었는데 이를 발전시켜 1976년 3월 ‘뿌리깊은나무’ 창간호를 내놨다. 한글전용, 가로쓰기 편집 등 당시로선 대단히 파격적인 디자인은 우리나라 잡지사에서 여전히 높이 평가되고 있다. 내용도 알차서 잡지는 구독자 수를 꾸준히 늘렸지만 1980년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 우리 문화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던 한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1984년 ‘샘이깊은물’을 창간해 2001년까지 잡지 발행을 이어 갔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만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이 두 잡지를 수집하는 사람들이 많다. 

뿌리깊은나무에서는 잡지와 별도로 ‘혼자 사는 외톨박이’, ‘이 땅의 이 사람들’ 등 여러 단행본도 펴냈고 모두 인기가 있어 그중에 무엇을 베스트로 뽑겠느냐 하는 질문만큼 대답하기 어려운 게 없다. 그래도 하나만 말해 보라면 나는 ‘민중자서전’이라고 하겠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유명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자서전인데 특이한 점은 당사자가 직접 책을 쓴 것이 아니라 구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책에 있는 소개 글을 빌려 보자면 “이름 없는 민중이 입으로 쓴 자서전”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도한 기획이다. 

‘민중자서전’은 1981년부터 10년간 총 스무 권이 출판됐다. 각 책은 한 사람이 말로 풀어낸 한평생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제암리 학살사건의 증인 전동례씨(1권)를 시작으로 조선 목수 배의환씨(2권), 보부상 유진룡씨(5권), 옹기쟁이 박나섭씨(7권), 진도 강강술래 앞소리꾼 최소심씨(9권), 벌교 농부 이봉원씨(12권), 옹기배 사공 김우식씨(19권) 등 평범한 민중들의 범상치 않은 인생역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주인공이 풀어놓는 입말을 편집 단계에서 가공하지 않고 들리는 그대로 본문에 기록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벌교에서 한평생을 산 농부 이봉원씨가 한 말을 읽어 보면 이렇다. “그전이는 인자 흔트모, 흔트모, 기양 방 골래서 여윽 꽂고, 여윽 꽂고, 여윽 꽂고, 그릏곰 기양 막 슁겨 나가. 기양 멍체이 모로 싱궜어. 기양 아믛게나 강골라서 차꼬 모 싱군 사람덜이 인자 방 골래서 꼽아, 항클방클허니.”(‘그때는 고롷고롬 돼 있제’, 민중자서전 12권, 73쪽.) 전라도 토박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강원도와 서울이 삶터인 나로 말하자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마치 외국어같이 느껴질 정도다.

본문 아래에 단어별로 주석을 달아 놓지 않았더라면 이 책을 올바르게 읽어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위의 말을 대강 해석해 보면, 예전에는 모를 심을 때 못줄을 쓰지 않고 내키는 대로 대충 심었기 때문에 모 심어 놓은 논을 보면 줄이 똑바르지 못하고 흐트러졌다는 의미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오랫동안 이어온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많이 잃었다. 눈으로 보이는 문화재가 망가지거나 도난당한 것은 물론 철학과 정신으로 전해 내려오는 정신문화 역시 적지 않게 훼손됐다. 이런 때 한씨는 이 땅의 전통문화를 찾아 되살리려는 노력으로 한평생을 보냈다. 한 나라의 힘은 곧 문화의 힘이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문화의 중심에는 언어가 있다. 그는 책을 만들어 파는 출판인이기 이전에 우리의 문화를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민중자서전’ 스무 권은 그런 철학이 오롯이 들어가 있는 책이다. 여러 지방 방언으로 말한 것을 소리 나는 그대로 받아 적어 책으로 만든 게 의미의 전부는 아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구술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으며 점차 사라지고 있는 지역 방언 연구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는 1997년에 세상을 떠난 한씨의 20주기다. 4월에는 서울시청 지하에 있는 서울시민청에서 20주기 추모전이 있었다. 공사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던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은 2011년 전남 순천 낙안읍성 근처에 개장했다. 그곳에는 뿌리깊은나무 출판사의 여러 출판물 실물이 전시되어 있고 한씨가 살아 있을 때 수집했던 전통문화 관련 소장품들도 둘러볼 수 있다. 바야흐로 무엇이든 새로운 것이라야 대접받는 시대다. 하지만 그 어떤 새로움도 지나간 것에서 배우지 않은 게 없다. 오늘 ‘민중자서전’을 다시 읽으며 “오래된 미래”라는 말을 실감하는 값진 우리 문화를 곰곰 생각해 본다.



- 서울신문.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 2017.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