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웨일스 산골에 있는 ‘헤이온와이(hay-on-wye)’는 세계적인 헌책방 마을이다. 1960년대 초 이곳에 처음 헌책방을 열고 각지의 헌책을 모아 쇠락해가는 마을을 문화 거점으로 탈바꿈시킨 리처드 부스는 이렇게 말했다.
“헌책은 오랜 세월 동안 전 세계를 오가며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헌책이야말로 ‘지식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며 지성과 지식을 대변한다.”
김언호(69·한길사 대표ㆍ사진)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은 리처드 부스의 이 말을 먼저 꺼냈다. 24시간 열린도서관 프로젝트 ‘지혜의 숲’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위해서였다.
‘지혜의 숲’은 내년 5월 파주출판도시에 문을 여는 새로운 개념의 도서관이다. 복합문화공간인 아시아출판문화센터와 게스트하우스 ‘지지향(紙之鄕)’의 공용 공간 1만 6500㎡(약 5000평)에 약 100만 권의 장서를 갖추고 24시간 운영하게 된다.
정독도서관의 장서가 약 50만 권, 서울 시내 어느 종합대학 중앙도서관의 장서가 약 100만 권이다. ‘종이의 고향’이라는 뜻을 가진 ‘지지향’이라는 이름대로 책을 사랑하는 독자들은 종이책 가득한 거대한 책의 숲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문자 미디어 지식의 리사이클링
김언호 이사장은 ‘지혜의 숲’ 프로젝트를 ‘지식의 리사이클링 운동’이라고 정의했다.
“문자 미디어는 깊은 성찰로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그중에서도 책은 우리가 가장 은혜를 입은 매체고요. 인류의 가장 위대한 정신적·문화적 유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보기술(IT)이 발전하면서 위기에 봉착했어요. 종이책이 푸대접을 받고 함부로 버려지고 있는 거죠.”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학자들의 귀중한 장서가 학교 도서관에서도 외면받고, 서점에서 반품된 책은 파쇄하거나 물에 녹여버린다. 그가 “모든 진리를 담고 있다”고 믿는 책들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생을 다한다. 지식과 정보도 함께 사라진다.
단명해 버리는 책에 숨을 불어넣어 그 안의 진리가 다시 세상을 돌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김 이사장이 말하는 ‘지식의 리사이클링’이다.
단지 종이책을 아끼는 마음으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독서력의 약화는 곧 지력(知力)의 약화로 이어지리라는 우려 때문이다. 김 이사장이 인구 노령화 못지않게 한국 사회의 큰 문제로 꼽는 것이 독서력의 약화다.
“독서력이 떨어진다는 건 지력이 떨어진다는 얘기입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몰라도 될 것까지 많은 걸 알게 됐지만 정작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고민과 생각은 안 하게 된 거죠. 지력이 저하됐다고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아요. 하지만 30년 후, 50년 후엔 국가의 창조적 역량이 떨어지는 부작용이 나타날 겁니다. 이런 일을 예방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이 책을 경험하게 만들어야 해요.”
그가 “독서는 젊은 시절부터 해야 하니 젊은이들을 책의 숲에 밀어 넣어버려야 한다”고 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독서는 운동과 같다”는 것이다.
“독서 근육이 따로 있어서 늘 훈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릴 때부터 독서 근육을 키워줘야 재미를 느끼고 지속적으로 책을 읽게 됩니다.” “예로부터 책 읽는 소리, 독서성(讀書聲)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데 그중에서도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가 최고라지 않습니까.” 그가 반복해 강조한 이야기들이다.
진정한 독서의 장을 만들기 위해 그는 개인·단체·출판사로부터 도서를 기증받고 있다. 한경구 서울대 교수, 박원호 고려대 명예교수, 이계익 전 교통부 장관, 안상수 전 홍익대 교수 등이 자신의 서가에 꽂혀있던 책 수천 권을 기꺼이 내놨다. 교보문고와 한길사·민음사·사계절·박영사·안그라픽스 같은 출판사들도 팔리지 않아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책을 기증했다. 중국·일본·대만 같은 아시아의 학자·출판인들의 장서도 기증받아 소장할 예정이다. 이런 작업들의 의미는 100만 장서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책들이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지성을 보호·보존하게 됐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김 이사장은 이 책들을 기증자별로 개별 서가를 마련해 비치할 계획이다. 천장높이 최고 8m, 복도 길이가 20m에 이르는 탁 트인 공간이 온통 책으로 채워진 ‘지혜의 숲’에서 독자들은 수백 개의 서재가 모인 지식의 집합체를 만나게 되는 셈이다.
“서재는 한 개인의 인생과 정신세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도서관 안에 기증자의 이름을 딴 ‘○○○ 문고’를 만들면 독자들은 지식인들의 학문적 궤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아주 귀중한 기회를 얻게 될 겁니다”
독서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문화 복지
파주출판도시는 2002년 1단계 사업이 완료돼 첫 입주가 시작됐다. 현재 약 8000명의 출판인이 일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찾기 힘든 출판·인쇄산업 집약지다. 지난 11년간 이룬 성과가 적지 않지만 김 이사장은 ‘지혜의 숲’으로 인해 파주출판도시도 한 차례 진화의 계기를 맞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시대의 출판문화는 독자에 의해 비로소 완성됩니다. 출판사·저자·독자가 세 개의 주체가 되어 함께 가야 하는 거죠. 지난 11년간 파주출판단지가 책을 만드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면, 이젠 책의 생명력을 연장해 독자가 그 가치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김 이사장은 ‘지혜의 숲’에서 펼쳐질 다양한 이벤트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있다. 강연회나 낭독회를 열 수도, 독자와의 대화를 열 수도 있다. 책 기증자들이 직접 내가 읽고 기증한 책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다. 영화 보느라, 쇼핑하느라, 게임하느라 부지기수로 밤샘하는 한국에서 독서하느라 ‘올나이트’ 못 하란 법 없으니 ‘잠 안 자고 책 읽기 대회’를 열 생각도 갖고 있다.
김 이사장은 “이 프로젝트가 파주 출판도시의 화룡정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체 건강하게 사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평균 수명이 길어진 100세 시대엔 독서하면서 정신도 건강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책 읽는 공간을 마련하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문화 복지 아니겠습니까. ‘지혜의 숲’이 그 장이 될 겁니다. 또 궁극적으로 아날로그의 위대한 업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업의 출발점이 될 겁니다.”
홍주희기자 honghong@joongang.co.kr | 제347호 | 20131103 입력
- 중앙선데이 201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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